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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면역

글리벡과 백혈병 치료제의 역사

by 면역이야기 2025. 8. 13.

 

돌연변이에서 시작된 질병

백혈병은 외부에서 침입한 병원체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몸의 세포에 일어난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해 생기는 암입니다. 특히 만성골수성백혈병(CML, Chronic Myeloid Leukemia)은 단 하나의 유전적 돌연변이로 인해 발생하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병은 오랜 시간 동안 치료가 어려운 치명적인 질환으로 여겨졌으며, 20세기 중반까지는 사실상 불치병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여기서 ‘골수성’이란 말은 우리 몸의 뼈 안에 있는 골수(뼛속 조직)에서 병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골수는 혈액 세포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기관으로,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등이 이곳에서 생성됩니다.

그중에서도 백혈구는 우리 몸을 병원체로부터 방어하는 면역세포인데, 크게 림프계 백혈구(예: B세포, T세포) 골수계 백혈구(예: 호중구, 단핵구, 호산구 등)로 나뉩니다.

  • 림프구 계열: B세포와 T세포처럼 주로 바이러스나 특정 병원체에 대한 정밀한 면역을 담당합니다.
  • 골수 계열: 호중구나 단핵구처럼 빠르게 반응하는 ‘선천면역’ 세포들이 포함됩니다.

골수성 백혈병(예: 만성골수성백혈병, CML)’은 이 중에서도 골수계에 속한 백혈구, 특히 호중구 계열의 세포에서 돌연변이가 발생해 비정상적인 증식이 일어나는 질환입니다. 반대로 ‘림프성 백혈병(예: 급성림프구성백혈병, ALL)’은 림프구 계열에서 문제가 생긴 경우를 말합니다.

필라델피아 염색체의 발견

1960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피터 노웰(Peter Nowell) 박사와 대학원생 데이비드 헝거포드(David Hungerford)는 CML 환자의 백혈병 세포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던 중 비정상적으로 짧은 22번 염색체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염색체는 정상적인 22번 염색체보다 길이가 짧았고, CML 환자에게서만 관찰되는 공통된 특징이었습니다. 이 돌연변이 염색체는 그들이 근무하던 도시의 이름을 따서 필라델피아 염색체(Philadelphia chromosome)라고 명명되었습니다.

이 발견은 암이 유전자의 돌연변이로부터 비롯될 수 있다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주장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증거였습니다.

염색체 전위와 BCR-ABL 융합 유전자

초기에는 필라델피아 염색체가 단순히 짧아진 22번 염색체로 보였으나, 1973년 미국의 세포유전학자 재닛 로울리(Janet Rowley) 박사가 이 이상을 보다 정밀하게 분석하였습니다. 그녀는 이 염색체 이상이 사실상 단순한 결손이 아니라, 9번 염색체와 22번 염색체 사이의 상호 전위(reciprocal translocation)라는 것을 최초로 밝혀냈습니다.

백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 전위

이런 염색체 전위는 두 염색체 사이에서 DNA 조각이 서로 교환되는 현상으로, 로울리 박사는 이 전위가 정확히 t(9;22)(q34;q11) 형태임을 밝혔습니다.

  • t(9;22)는 9번 염색체와 22번 염색체가 전위되었다는 뜻입니다.
  • q34는 9번 염색체의 긴 팔(long arm)에서 34번째 위치,
  • q11은 22번 염색체의 긴 팔에서 11번째 위치를 의미합니다.

이 전위로 인해 9번 염색체의 ABL 유전자와 22번 염색체의 BCR 유전자가 비정상적으로 융합되며, 이 융합 유전자가 BCR-ABL 융합 단백질을 만들어냅니다. 이 단백질은 계속해서 활성화된 티로신 키나제 기능을 가지고 있어, 세포 증식 신호를 멈추지 않고 보내게 되고, 이로 인해 백혈병 세포가 통제되지 않은 채 증식하게 됩니다.

이 융합 유전자는 정상 세포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CML 환자의 골수세포에서만 관찰되는 고유한 유전적 이상입니다.

BCR-ABL 단백질과 백혈병의 발생

BCR-ABL 융합 유전자는 비정상적으로 활성화된 티로신 키나제(tyrosine kinase)라는 효소 단백질을 생성합니다. 이 단백질은 세포 내에서 “계속해서 자라라”는 신호를 멈추지 않고 보내며, 이로 인해 조혈모세포가 끊임없이 증식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정상적인 백혈구가 아니라 백혈병 세포들이 과도하게 늘어나게 되며, 이것이 만성골수성백혈병의 핵심 기전입니다.

다시 말해, 필라델피아 염색체는 CML의 원인 그 자체이며, 이 질환은 단 하나의 유전자 융합만으로도 발병할 수 있는 특이한 형태의 암입니다.


표적 치료의 탄생: 글리벡의 개발

브라이언 드루커

 

필라델피아 염색체가 백혈병의 원인임이 밝혀지자, 이를 직접 겨냥한 약물을 개발하려는 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브라이언 드루커(Brian Druker) 박사는 오리건 보건과학대학교에서 BCR-ABL 단백질의 활성을 억제할 수 있는 물질을 찾고자 하였고, 스위스의 제약회사 노바르티스(당시에는 Ciba-Geigy)의 화학자 니콜라스 라이돈(Nicholas Lydon)과 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니콜라스 라이돈

두 사람은 수천 개의 후보 화합물 중에서 STI-571이라는 분자에 주목하였습니다. 이 물질은 BCR-ABL 단백질의 활성을 억제하는 효과가 뛰어났으며, 정상 세포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 STI-571이 바로 훗날 이마티닙(Imatinib)으로 명명되었고, 상품명 글리벡(Gleevec, Glivec)으로 세상에 공개되게 됩니다.


글리벡 임상 초기의 위기: 실패보다 무관심과 저항

글리벡의 임상시험은 단순히 성공 일변도가 아니었습니다. 초기에는 과학적 성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약사 내부의 회의, 임상 설계의 보수성, 환자 수급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임상 자체가 제대로 시작되지 못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1. 제약사의 회의적 태도

1990년대 중반, 시바-=가이기(현 노바르티스)는 Imatinib(STI-571)의 BCR-ABL 억제 효과를 시험관 수준에서 확인했지만, 사내 임상 부서나 고위 경영진은 이 약의 상용 가능성에 회의적이었습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표적 치료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고, 암은 일반적으로 다양한 돌연변이를 가진 복잡한 질병이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 하나의 유전자를 억제하는 방식으로 실질적인 치료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되었습니다.
  • 만성골수성백혈병(CML)은 비교적 드문 병이었고, 시장성이 낮다고 판단되어 상업적 가치가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이 때문에 STI-571은 한때 ‘보류 프로젝트’로 밀려났고, 개발이 중단될 뻔했습니다.

2. 브라이언 드루커 박사의 집념

 

이러한 상황에서도 브라이언 드루커(Brian Druker) 박사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STI-571을 진정한 표적항암제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었고, 이를 임상으로 연결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제약사를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임상 1상을 승인받기까지 2~3년에 걸친 지연이 발생했습니다.

3. 환자들의 항의와 참여 요청

1998년, 마침내 극소수의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 1상이 승인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임상시험이 환자들의 기대 이상으로 빠르게 좋은 반응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연구는 계속 확대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회사 내부에서 임상 확대를 주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미 글리벡 소식을 들은 많은 환자들이 임상 참여를 희망하며 직접 항의 서한을 보내거나 담당 연구자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제발 저에게도 그 약을 써보게 해주세요.”
“이게 안 되면 저는 죽습니다.”

이러한 요구는 단순한 민원이 아니라 생존을 건 요청이었습니다. 결국 이와 같은 환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압박이 노바르티스를 움직이게 했고, 임상 2상이 본격적으로 확대되면서 현재 우리가 아는 ‘기적의 약’ 글리벡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요약: 실패가 아니라 ‘거절당한 가능성’의 극복

글리벡의 임상시험은 과학적으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패당할 뻔했던 가능성’이었습니다. 그것을 되살린 것은:

  • 브라이언 드루커의 과학적 확신과 끈기,
  • 초기 임상에 참여했던 환자들의 놀라운 반응,
  •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기회를 붙잡으려는 환자들의 간절함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오늘날 환자 중심 의료와 정밀의학의 가치가 왜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내성과 후속 치료제

물론 글리벡이 모든 환자에게 항상 효과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부 환자는 치료 중에 새로운 돌연변이가 생겨 BCR-ABL 단백질이 구조적으로 변화하였고, 그 결과 글리벡에 대한 내성이 나타났습니다.

이에 따라 제약업계는 빠르게 2세대, 3세대 티로신 키나제 억제제를 개발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다사티닙(Dasatinib), 니로티닙(Nilotinib) 등이 있으며, 글리벡에 내성이 생긴 환자에게 사용되어 다시 치료 효과를 끌어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포나티닙(Ponatinib) 같은 고도 내성 환자용 약제도 개발되었습니다.


결론: 백혈병은 외부 질병이 아니라 내부 돌연변이입니다

글리벡의 등장은 단지 CML 치료의 발전을 넘어서, 암이라는 질환 자체를 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꿨습니다. 암은 세균처럼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유전자가 스스로의 오류로 인해 병든 상태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필라델피아 염색체의 발견은 그 첫 시작이었고, 글리벡의 개발은 이러한 지식을 실제 치료로 연결시킨 첫 성공 사례입니다. 이로 인해 오늘날 암 치료는 점점 더 ‘정밀의학(precision medicine)’, 즉 각 환자의 유전적 상태에 맞춘 치료로 발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