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치료의 새로운 서막: HER2 유전자의 발견
1980년대 초,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바이오벤처 제넨텍은 막 태동하던 유전자 기반 의약품 개발의 최전선에 있었습니다. 이 회사의 젊은 과학자 알렉스 울리히(Axel Ullrich)는 세포 성장을 조절하는 유전자를 탐색하던 중, 암세포에서 비정상적으로 활발하게 작동하는 새로운 유전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이 유전자를 HER2(human epidermal growth factor receptor 2)라고 명명하였고, 1985년 그의 연구실 소속 과학자 리사 카우센스(Lisa Coussens)는 HER2 유전자를 세계 최초로 복제하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 유전자가 암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뀐 건, UCLA의 종양학자 데니스 슬라몬(Dennis Slamon) 박사가 HER2 단백질의 과발현이 유방암 환자의 생존율을 극적으로 낮춘다는 사실을 밝혀내면서였습니다. 슬라몬 박사의 논문은 유방암 환자 중 약 20~25%가 HER2를 과도하게 발현하고 있으며, 이 경우 암세포의 증식 속도가 매우 빠르며 재발률 또한 높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회의와 외면 속에서 태어난 아이디어
HER2가 유방암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새로운 치료 전략의 실마리를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명확했습니다. “과연 이 단백질을 직접 겨냥할 수 있을까?”
당시 항체 치료제는 개념적으로는 존재했지만, 암 치료제로서의 가능성은 회의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HER2는 환자 자신의 세포 표면에 있는 단백질이기 때문에, 이를 억제하면 정상 세포까지 손상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넨텍의 마이클 셰퍼드(H. Michael Shepard)는 항체가 암세포의 성장을 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HER2 단백질을 인식하고 억제하는 항체 후보 4D5를 개발했고, 이 후보는 이후 인간의 단백질 구조에 맞춰 인간화(humanization)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허셉틴, 생명을 향한 이름
이렇게 개발된 인간화 항체가 바로 트라스투주맙(trastuzumab)이며, 상품명은 허셉틴(Herceptin)으로 정해졌습니다. ‘HER2’와 ‘Perception’을 합친 이름으로, 암을 보는 방식 자체를 바꾼다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약은 개발되었어도, 이를 임상시험에 올리는 일은 또 다른 전쟁이었습니다.

임상시험과 환자의 외침
1992년, 제넨텍과 UCLA는 공동으로 임상 1상 시험을 시작했습니다. 단 15명의 말기 HER2 양성 유방암 환자가 참여한 이 시험에서, 놀랍게도 여러 환자에서 종양이 작아지는 반응이 관찰되었습니다. 의학계는 깜짝 놀랐지만 여전히 회의적이었습니다.
그 후 1990년대 중반, 임상시험이 확대되지 못하고 멈춰버릴 뻔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제약사의 재정 부담, 환자 선별의 어려움, 그리고 과학계 내부의 회의론이 겹쳐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움직인 건 환자와 가족들이었습니다.
임상에 참여한 일부 환자는 생존의 희망을 보았고, 소문은 퍼져나갔습니다.
“허셉틴을 맞고 싶다.” “이 약이 나를 살릴 수 있다.”
전화와 편지가 제넨텍에 쏟아졌고, 일부 환자는 UCLA까지 찾아와 의사에게 호소했습니다.
결국 제넨텍은 추첨(lottery system)을 통해 제한된 수량의 약을 제공하기로 결정하고, 임상 3상 확대를 강행하게 됩니다.
승인과 그날의 환호
1996년부터 시작된 3상 시험에는 900명 이상의 환자가 참여하였습니다. 이 시험은 허셉틴과 표준 화학요법을 병행한 군과 화학요법 단독군을 비교하였으며, 그 결과는 의심할 여지 없이 놀라웠습니다. 허셉틴 병용군에서 사망 위험이 20% 감소하였고, 무병 생존기간이 유의미하게 연장되었습니다.
이 데이터는 미국 FDA의 판단을 뒤흔들었고, 마침내 1998년 9월 25일, 허셉틴은 HER2 양성 전이성 유방암 치료제로 공식 승인을 받았습니다. 이는 세계 최초의 표적 항체 기반 암 치료제의 승인이었으며, 암 치료 역사에서 하나의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허셉틴이 바꾼 것들
허셉틴은 단순히 한 가지 암을 치료하는 약이 아니었습니다. 이 약은 암을 ‘타깃’하는 개념, 즉 정밀의학의 현실화를 보여주었으며, 이후 수많은 표적치료제와 항체-약물 복합체(ADC)의 개발을 촉진했습니다.
- 2006년: 수술 후 보조요법(재발 방지) 승인
- 2010년: HER2 양성 위암, 위식도접합부 암 적응증 추가
- 현재: 전 세계 200만 명 이상에게 투여, HER2 양성 유방암 환자의 생존율 비약적 향상
또한 허셉틴의 구조를 기반으로 개발된 카드실라(Kadcyla)는 트라스투주맙과 세포독성 물질을 연결하여 더 정밀하고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차세대 치료제로 자리잡았습니다.
허셉틴을 만든 사람들
알렉스 울리히 | HER2 유전자 복제 (1985) |
H. 마이클 셰퍼드 | 트라스투주맙 항체 설계 및 개발 |
데니스 슬라몬 | HER2 예후 인자 규명, 임상시험 주도 |
이후 2019년에 허셉틴 개발의 핵심 주역인 H. 마이클 셰퍼드, 데니스 J. 슬라몬, 알렉스 울리히 세 과학자가 ‘라스커-드베이키 위학연구상(Lasker~DeBakey Clinical Medical Research Award)’을 공동 수상하였습니다. 이 수상은 허셉틴이 HER2 양성 유방암 환자의 생존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대표적 표적 항체 치료제임을 국제적으로 공식 인정한 사건입니다.
결론: 암 치료, 가능성을 현실로
허셉틴의 여정은 단순히 신약 하나가 승인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과학자들의 끈기, 의사의 사명감, 환자의 용기, 그리고 기술의 발전이 하나의 목표 – 생명을 구하는 약으로 결집된 이야기입니다.
허셉틴은 암 치료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이후의 모든 정밀 항암제들은 그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 약은 오늘도 누군가의 생명을 지켜주고 있으며, 과학이 삶을 바꾼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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