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격 전야: 고요 속의 긴장
1943년 12월 2일 밤, 이탈리아 바리 항구는 연합군의 물자 수송으로 북적였습니다. 항구는 24시간 내내 불을 밝히며 과부하 상태로 운영되고 있었고, 주변 마을 주민들은 이러한 상황이 독일군의 기습 공격에 취약하다고 우려했습니다. 실제로 독일 정찰기들은 폭격 이틀 전부터 바리 상공을 반복적으로 비행하며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은 독일 공군이 이미 패퇴했으며, 이렇게 남쪽 깊숙한 곳까지 공격할 수단이 없다고 판단하여 방공망을 허술하게 유지했습니다. 근처에 영국 공군 기지도 없었고, 대공포도 최소한의 수량만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항구에는 연합군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가져온 대량의 겨자가스 폭탄을 싣고 있던 미군 수송선 'SS 존 하비(SS John Harvey)'호가 정박해 있었습니다. 이 화물은 최고 기밀 사항이었으며, 심지어 배의 선원들조차 그 정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지옥이 열리다: 폭격의 순간
1943년 12월 2일 저녁 7시 30분, 고요했던 바리 항구에 갑작스러운 폭음이 울려 퍼졌습니다. 독일 공군 융커스(Junkers) 폭격기 50대가 동쪽에서 날아와 레이더를 교란하기 위해 알루미늄 포일 조각(Düffel)을 뿌리며 기습 공격을 시작했습니다.4 처음에는 폭탄이 항구 대신 도심에 떨어져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좁은 골목길을 가로질러 항구 쪽으로 필사적으로 도망쳤습니다.
폭격기들이 목표를 수정한 후, 항구는 문자 그대로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폭탄이 밀집된 화물선들을 향해 쏟아졌고, 배들은 마치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타격을 입었습니다.4 당시 항구에 있던 약 30척의 화물선 중 17척이 침몰하거나 완전히 파괴되었고, 약 34,000톤의 화물이 수장되었습니다. 추가로 10여 척의 배들도 손상을 입었습니다.4 특히, 탄약을 싣고 있던 두 척의 배가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고, 해안의 가솔린 파이프라인이 파열되어 연료가 항구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침몰한 배들에서 흘러나온 기름은 불길을 더욱 확산시켜, 항구 전체가 거대한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하늘에서는 불타는 금속 조각들이 마치 종이처럼 비처럼 쏟아져 내렸고, 바리 시내의 모든 창문이 깨져 나갔습니다.

가장 치명적인 순간은 SS 존 하비호가 직격탄을 맞았을 때였습니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배가 산산조각 나면서, 비밀리에 실려 있던 액체 겨자가스(sulfur mustard)가 바닷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겨자가스는 침몰한 배들에서 흘러나온 기름과 섞여 항구 전체를 뒤덮는 죽음의 액체층을 형성했습니다. 또한, 폭발의 열기와 물이 섞이면서 겨자가스 증기가 거대한 구름을 형성하여 도시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폭발의 충격은 20마일 밖에서도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군사적 기밀 유지가 비극을 어떻게 심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연합군 지도부, 특히 아이젠하워 장군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독일이 화학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보복 공격을 감행할 것을 우려하여 겨자가스 화물의 존재를 극비에 부쳤습니다.1 이러한 엄격한 기밀 유지 정책 때문에 의료진은 겨자가스 노출의 위험성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1 그 결과, 의료진은 환자들을 단순한 쇼크나 화상, 또는 "진단 미정 피부염(Dermatitis N.Y.D.)"으로 오진하고, 겨자가스에 오염된 옷을 입은 채로 환자들을 방치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1 이는 많은 생존자들이 겨자가스에 "절여지는" 것과 같은 상황에 놓이게 하여 사망률을 크게 높이는 원인이 되었습니다.1 이처럼 군사적 기밀 유지는 전쟁의 비극을 더욱 심화시키고, 무고한 생명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사고가 아니라, 정보 통제가 낳은 인재(人災)의 성격을 띠게 됩니다.
혼돈 속의 고통: 초기 의료 대응과 미스터리
폭격 다음 날부터 수백 명의 부상자들이 이상한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피부 병변, 일시적인 실명, 불규칙한 맥박과 혈압 등 일반적인 쇼크 증상과는 맞지 않는 패턴이었습니다. 일부 환자들은 상태가 나아지는 듯하다가도 갑자기 몇 분 만에 사망하기도 했습니다.4 환자들을 직접 접촉한 병원 직원들에게서도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 의료진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본부에서는 이러한 특이 증상을 보이는 수백 명의 화상 환자들을 "진단 미정 피부염"으로 분류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항구의 물은 기름과 겨자가스가 뒤섞여 죽음의 칵테일이 되어 있었습니다. 폭발로 바다에 던져지거나 스스로 뛰어든 사람들은 이 독성 혼합물에 뒤덮였고, 그들의 옷은 겨자가스에 완전히 스며들었습니다. 구조된 이들은 겉으로는 괜찮아 보였기에, 더 위급해 보이는 폭발 및 화상 환자들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려 담요와 따뜻한 차를 받고 오염된 옷을 입은 채로 12시간에서 심지어 24시간까지 방치되었습니다. 이는 사실상 겨자가스에 "절여지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환자들은 노출 후 몇 시간 뒤부터 눈에 모래가 들어간 듯한 이물감, 작열감, 통증을 호소했고, 이는 잠든 환자들을 깨울 정도로 심했습니다. 무기력하고 사지가 따뜻한 등 비전형적인 쇼크 증상을 보였으며, 일반적인 쇼크 치료에도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항구에서는 마늘 냄새가 진동했지만, 기름, 휘발유, 연기 냄새와 뒤섞여 그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겨자가스는 피부 물집, 눈과 호흡기 손상을 일으키며, 고용량에서는 치명적인 세포 독성 물질입니다.9 그러나 바리 환자들의 증상은 피부 병변, 일시적 실명, 불규칙한 맥박/혈압 등 일반적인 쇼크나 화상과는 다른 비정형적 양상을 보였습니다.1 특히, 증상이 즉시 나타나지 않고 수 시간의 잠복기를 거쳐 점진적으로 발현되는 특성 때문에 초기 진단이 더욱 어려웠습니다.10 항구의 기름과 겨자가스가 섞이면서, 물에 빠진 생존자들은 이 혼합물에 뒤덮여 겨자가스가 옷에 스며들어 장시간 노출되었고, 이는 일반적인 증상과 다른 양상(예: 성기가 10배로 부어오르는 등)과 더 높은 치사율을 초래했습니다. 이러한 비정형성과 기밀 유지로 인한 정보 부재는 의료진의 혼란과 오진을 야기했으며, 적절한 치료가 지연되어 많은 희생자를 낳았습니다. 이는 화학 무기 노출의 복잡성과, 특히 비전형적인 환경(오일 혼합)에서의 노출이 진단과 치료에 얼마나 큰 어려움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며, 기밀 유지가 인도주의적 재난을 어떻게 악화시킬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결국 화학전 전문가인 스튜어트 프랜시스 알렉산더(Stewart Francis Alexander) 중령이 현장에 파견되었습니다.
독가스 전문가의 조사와 충격적인 발견
알렉산더는 화학전 전문 의무장교로, 메릴랜드주 에지우드 화학전 연구소에서 맹독성 작용제들에 대한 교육과 동물 실험 경력을 쌓은 인물이었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알렉산더 대령은 치료 중인 환자들의 상태를 면밀히 살폈습니다. 그는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코끝을 찌르는 알싸한 마늘 냄새를 맡고 직감적으로 “겨자 가스!”를 떠올렸다고 전해집니다. 실제로 환자들의 임상 양상은 그가 이전에 실험실에서 봤던 것들과 묘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알렉산더는 먼저 폭격 당시 환자들이 있던 위치와 경로를 추적해보았습니다. 부상자들의 분포를 분석한 결과, 증상이 특히 심각한 이들은 폭발 당시 존 하비 호 근처에 있었거나 바다에 뛰어들었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는 항만에서 수거된 파편들을 조사하던 중 미군이 제조한 M47A1 겨자탄 조각을 발견함으로써 마침내 화학 작용제의 존재를 물증으로 확인했습니다. 연합군이 은폐하려 했던 겨자 가스 누출 사고의 실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알렉산더 대령은 즉시 현지 의료진에게 환자들이 유독가스에 노출되었음을 알리고, 가능한 한 모든 격리와 제독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했습니다en.wikipedia.org. 그의 신속한 대응 덕분에 추가 희생을 상당수 막을 수 있었습니다.
바리 항구 폭격 피해 현황
구분 | 내용 |
침몰/파괴된 선박 수 | 17척 이상 |
손상된 선박 수 | 10여 척 |
군인 사상자 수 | 700명 이상 (부상자 628명, 사망자 83명 포함) |
민간인 사상자 수 (추정) | 1,000명 이상 (정확한 집계 불가) |
화물 손실량 | 34,000 U.S. 톤 |
하지만 알렉산더의 임무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번 사건이 의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부상병들의 혈액 및 장기 상태를 조사하던 알렉산더는 환자들의 림프조직과 골수가 심각하게 손상된 흔적에 주목했습니다. 많은 환자들에게서 백혈구 수치가 폭격 후 며칠째 되는 날부터 급격히 떨어졌고, 특히 면역을 담당하는 림프구가 가장 먼저 자취를 감추는 양상이 반복해서 관찰되었습니다. 일부 중증 환자의 경우 말 그대로 혈액 속 백혈구가 사라지고 림프절이 빈 껍데기처럼 쪼그라든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소견은 일반적인 화상이나 폭풍 피해에서는 볼 수 없는, 전에 없는 현상이었습니다.
이때 알렉산더 대령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 것은, 자신이 불과 1년 전에 실험실에서 목격했던 광경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1942년 초엽, 알렉산더는 미군 화학전에 투입된 실험동물들을 대상으로 신종 독가스의 생체 영향 연구를 진행한 바 있었습니다. 그가 다뤘던 물질은 독일에서 몰래 입수한 질소 머스터드(nitrogen mustard), 즉 겨자 가스와 유사한 화합물이었습니다. 토끼 20마리에 소량의 질소 머스터드를 투여한 그의 실험에서,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투여 후 며칠 만에 토끼들의 백혈구 수치가 0에 가까워질 정도로 급감했고, 면역기관인 림프절과 혈액 생성기관인 골수 조직이 빠르게 파괴되었습니다. 연구팀은 처음엔 실험이 잘못된 줄 알고 반복 시험을 했지만, 쥐나 기니피그 같은 다른 동물로 해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찍이 보고된 적 없는 이러한 급성 백혈구 감소와 림프조직 소실 현상에 알렉산더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 현상이 지금 눈앞의 부상병들에게서 똑같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알렉산더는 “피폭된 군인들의 혈액세포가 증발하듯 사라지고 림프절이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며 등골이 오싹해졌다”고 훗날 회고했습니다.
이 관찰은 알렉산더에게 한 가지 중대한 영감을 주었습니다. “만약 겨자 가스가 이렇게 백혈구를 선택적으로 파괴할 수 있다면, 백혈구가 너무 많이 생겨나는 병, 이를테면 백혈병이나 악성 림프종 같은 암에는 효과가 없을까?” 알렉산더는 이렇게 자문했습니다. 실제로 백혈병과 림프종은 백혈구 계통 세포가 통제 없이 증식하는 질환입니다. 알렉산더 대령은 전시에 바쁜 임무 와중에도 겨자 가스의 암 치료 잠재력을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는 수집 가능한 한 최대한의 환자 혈액 샘플과 조직 검체를 확보하여 미군 화학전 연구소로 보내는 한편, 부상자들의 임상 경과를 상세히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모은 인체 데이터를 바탕으로, 언젠가 이 맹독성 물질을 암세포를 공격하는 약으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령은 열흘 간의 조사를 마치고 1943년 12월 27일 부로 바리 사건에 대한 예비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그의 보고서에는 겨자 가스로 인한 전신적인 백혈구 파괴 효과와 그 잠재적 의학적 활용 가능성이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즉시 군 최고기밀로 분류되었고, 아이젠하워 미군 총사령관과 처칠 영국 총리는 바리의 겨자 가스 사고를 철저히 은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만약 이 사실이 드러나면 독일이 이를 빌미로 가스전을 개시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영국 측은 바리의 모든 의료 기록에서 “겨자”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사망 원인을 모두 “적군의 폭격에 의한 화상”으로 위장시켰습니다. 결국 바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수십 년간 역사 속에 묻혀 버렸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마음속에는 전쟁의 비극 속에서 찾아낸 한 줄기 희망이 움트고 있었습니다.
최초의 항암제 탄생을 향한 숨은 노력
알렉산더의 보고서는 군사 기밀로 묻혔지만, 그의 발견은 이미 조용히 전해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몇몇 의학자들과 군 연구자들은 겨자 가스의 이러한 특이한 효과에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알렉산더가 바리에서 조사를 벌이기 전부터도 비슷한 아이디어가 물밑에서 진행 중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미군은 유사시를 대비해 겨자 가스 등 화학무기의 치료적 사용 가능성을 검토하는 비밀 연구를 일부 대학에 의뢰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일대 의과대학의 약리학자 루이스 굿맨과 알프레드 길만은 군과 계약을 맺고 겨자 가스와 구조가 비슷한 “X 물질”에 대한 연구를 1942년부터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동물 실험을 통해 이 물질이 림프계 종양에 효과가 있을 수 있다는 희망적인 결과를 얻었습니다. 실제로 몸에 악성 종양이 이식된 쥐에 투여한 결과 종양이 눈에 띄게 작아졌고 몇 차례 치료 후에는 완전히 소멸되기도 했습니다. 이 놀라운 실험 성공에 고무된 연구팀은 인간에게도 시험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1943년, 미국에서는 말기 암 환자를 대상으로 한 극비 임상 실험이 조심스럽게 시작되었습니다. 코네티컷주의 한 병원에서는 온몸에 림프종이 퍼져 치료가 불가능해진 40대 남성 환자 한 명이 실험 대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환자는 이미 방사선 치료 등 가능한 방법을 모두 시도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해 절망적인 상태였습니다. 의사들은 그에게 마지막 수단으로 당시 “X 물질”로 불린 정체불명의 약물 주사를 제안했고, 환자는 승낙했습니다. 1943년 말, 환자는 정맥을 통해 질소 겨자 가스 유도체 약물을 투여받았습니다. 그 결과는 당시로서는 가히 기적적이었습니다. 투여 후 며칠 만에 환자의 목과 겨드랑이에 꽉 들어차 있던 종양 덩어리가 부드러워지더니 차차 크기가 줄어들었습니다. 2주 가량 지나자 겉으로 만져지던 종양이 거의 사라지고 고열과 통증 같은 암 증상도 크게 완화되었습니다. 의학자들은 난생 처음 눈으로 확인한 화학 물질을 이용한 암의 관해(寬解) 현상에 흥분했습니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항암 화학요법(chemotherapy)의 탄생 순간이었습니다.
다만 환자의 회복이 영원히 지속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약물 투여를 중단한 지 한 달 반쯤 지나자 남아 있던 암세포들이 내성을 갖고 다시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환자는 추가로 같은 약물을 몇 차례 더 투여받았지만 더 이상 듣지 않았고, 결국 첫 치료를 시작한 지 약 3개월 후 숨을 거두었습니다. 비록 완치는 아니었지만, 단기간이나마 거대했던 종양이 자취를 감춘 임상 사례는 의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1946년에 굿맨과 길만 연구팀은 비밀을 해제하고 그동안 진행했던 임상시험 결과를 정식 논문으로 발표했습니다. 거기에는 수십 명의 말기 림프종, 백혈병 환자들에게 겨자 가스 유도 항암제를 투여한 기록이 담겨 있었고, 상당수 환자에서 암이 일시적으로나마 현격히 줄어드는 부분 관해가 관찰되었음이 보고되었습니다. 비록 효과가 영구적이지 않고 부작용도 심각했지만, 암이 화학물질로 치료될 수 있다는 증거가 처음으로 제시된 순간이었습니다.
알킬화제 계열 항암제의 개발과 초기 적용
연합군의 바리 항구 참사로부터 얻어진 의학적 깨달음과, 이어진 미군 연구진의 임상 실험 결과는 전후 의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1940년대 후반이 되자 미국에서는 본격적으로 항암제 개발 프로젝트가 가동되었습니다. 화학무기 연구 경력이 있던 코니لي어스 로즈 박사는 알렉산더 대령의 바리 보고서와 예일대 연구진의 성과에 자극받아 전후 대대적인 암 치료 연구 자금을 확보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 결과 1945년 뉴욕에 슬론-케터링 연구소가 설립되어 새로운 항암제 후보 물질들이 본격적으로 시험되었습니다. 마침내 1949년, 겨자 가스를 개량한 머스터드 계열 항암제 중 하나가 미 식품의약국의 사용 승인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약물은 메클로레타민(mechlorethamine)이라는 질소 머스타드 유도체로, 세계 최초로 공식 승인을 받은 항암 화학요법 약제가 되었습니다. 주로 림프종과 백혈병 같은 혈액암 환자들에게 투여된 이 약물은 종양을 일시적으로 축소시키는 뚜렷한 효과를 보였고, 몇 주에서 몇 달 동안 증상이 호전되는 환자들이 보고되었습니다. 비록 환자들에게 심각한 부작용이 따랐지만, 약으로 암을 통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현실로 보여준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작용 기전을 활용한 여러 알킬화제 계열 항암제들이 연이어 개발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염소 원자를 포함한 머스타드 유도체인 클로람부실과 부설판 등이 나오며 만성 백혈병 치료에 적용되었고,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체내에서 활성화되는 시클로포스파미드와 같은 약물도 등장했습니다. 시클로포스파미드는 1959년 미국에서 승인되어 다양한 고형암과 자가면역질환에도 폭넓게 쓰이게 되었고, 이후 가장 널리 사용되는 항암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960년대에는 여러 약물을 동시에 사용하는 '복합 화학요법'이 개발되면서 소아 백혈병이나 진행성 호지킨병과 같은 특정 암의 완치율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13 이는 화학요법의 효능을 강력하게 입증하며 '암의 완치 가능성'이라는 개념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또한, 수술이나 방사선 치료 후 미세 잔존 암세포를 제거하여 재발을 막는 '보조 화학요법'의 개념도 탄생했습니다.
이러한 성공은 1971년 미국에서 '국가암법(National Cancer Act)'이 통과되고 '암과의 전쟁'이 선포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암 연구 및 치료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졌습니다.13 1990년대 이후에는 암세포의 특정 분자적 이상을 표적으로 하는 '표적 치료제'가 개발되면서 더욱 정밀하고 효과적인 치료가 가능해졌습니다.
오늘날, 100가지가 넘는 다양한 화학요법 약물들이 개발되어 있으며, 이들은 종종 수술, 방사선 치료, 면역 치료 등 다른 치료법과 병행하여 사용됩니다. 바리 사건의 비극 속에서 시작된 화학요법의 여정은 끊임없는 연구와 발전을 거듭하며, 1990년 이후 암 사망률 감소에 크게 기여하는 등 인류의 건강 증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쟁의 비극 속에서 피어난 생명의 희망은 현재 진행형인 암과의 싸움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길을 열고 있습니다.
항암 화학요법 발전의 주요 이정표
연도 | 주요사건/발견 | 주요인물 | 내용 및 의의 |
1942년 | 질소 겨자가스의 첫 임상 시험 | 루이스 굿맨, 알프레드 길먼, 구스타프 린스코그 | 최초의 화학요법 시도, 종양 퇴축 효과 확인. |
1943년 | 바리 항구 겨자가스 폭발 사고 | 스튜어트 프랜시스 알렉산더 | 겨자가스의 선택적 백혈구 파괴 효과 관찰, 항암제 개발의 결정적 계기. |
1946년 | 질소 겨자가스 연구 결과 공개 | 굿맨, 길먼 팀 | 화학요법 연구의 시작을 알림, 대중적 관심 증대. |
1949년 | 메클로레타민(머스타젠) FDA 승인 | (개발팀) | 최초의 공식 항암 화학요법제, '항암 화학요법 시대' 개막. |
1955년 | 암 화학요법 국립 서비스 센터(CCNSC) 설립 | 켄 엔디콧, 메리 래스커 | 체계적이고 국가적인 암 치료제 개발 노력의 시작. |
1960년대 | 복합 화학요법 개발 (VAMP, MOPP) | (연구팀) | 특정 암(소아 백혈병, 호지킨병)의 완치 가능성 제시, 화학요법의 효능 입증. |
1971년 | 국가암법(National Cancer Act) 통과 | (미국 정부) | '암과의 전쟁' 선포, 암 연구 및 치료에 대한 대규모 투자. |
1990년대 이후 | 표적 치료제 개발 및 확산 | (다수 연구자) | 암 생물학 이해 증진, 특정 분자 표적을 겨냥한 정밀 치료 시대 개막. |
머스터드 유도체 항암제의 작용 기전과 의의
겨자 가스에서 유래한 이러한 항암제들은 알킬화제로 분류됩니다. 쉽게 말해, 알킬화제는 세포 내 유전물질(DNA)에 화학적으로 달라붙어 손상을 일으키는 약물입니다. 머스터드 계열 화합물은 세포 속에 들어가면 매우 반응성이 높은 중간체를 형성하고, 그 중간체가 DNA 사슬에 알킬기(탄화수소 작용기)를 붙여 구조를 변형시킵니다drugdiscoverynews.com. 그 결과 유전물질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세포가 더 이상 분열하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암세포는 정상세포보다 분열 속도가 훨씬 빠르기 때문에 이러한 DNA 알킬화 공격에 특히 취약합니다. 겨자 가스로 인해 백혈구처럼 분열이 왕성한 세포들이 선택적으로 파괴된다는 알렉산더의 현장 관찰과 연구자들의 동물 실험은 바로 이 원리를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한편 이들 약물은 암세포뿐 아니라 골수 세포나 소화기 세포 등 정상 조직 중에서도 분열 주기가 빠른 세포들까지 손상시키므로,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초기 항암제 투여 환자들에게서 심한 구토, 탈모, 혈액 세포 감소 등의 부작용이 나타났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비록 독성이 강해 환자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지만, 머스터드 가스의 살상력을 인체 내 암세포에 선택적으로 적용한다는 아이디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습니다.
전쟁에서 탄생한 독가스 무기는 이렇게 의학의 무기가 되었습니다. 1943년 바리 항구에서 일어난 끔찍한 참사는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지만, 역설적으로 그 사건을 통해 최초의 항암제가 개발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겨자 가스에서 비롯된 화학요법은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현대에는 다양한 맞춤 표적치료제와 면역항암제로까지 이어지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인류는 전쟁의 비극 속에서 오히려 생명을 살리는 치료의 씨앗을 발견해낸 셈입니다.
참고 문헌
- Jennet Conant. (2020). The Bombing and the Breakthrough. Smithsonian Magazine – History. smithsonianmag.comsmithsonianmag.com (바리 항구 폭격 피해 규모 및 비밀 겨자 가스탄 언급) - 각종 사진 자료 많음.
- Yuning Wang. (2023). Chemotherapy’s hidden origins. Drug Discovery News – Cancer Research. drugdiscoverynews.comdrugdiscoverynews.com (최초 항암제 임상 시험 결과와 1949년 머스터드 계열 항암제 승인의 배경)
- Sarah Hazell. (2014). Mustard gas – from the Great War to frontline chemotherapy. Cancer Research UK Blog. news.cancerresearchuk.org (겨자 가스 노출로 인한 백혈구 감소 관찰 및 항암제 발상 계기)
- Wikipedia. Cyclophosphamide. (accessed July 2025) en.wikipedia.org (시클로포스파미드의 승인 연도 등 초기 임상 활용 정보)
- https://en.wikipedia.org/wiki/Air_raid_on_B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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