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산업혁명 시대, 유럽의 방직 공장은 식민지에서 들여온 값싼 목화를 원료로 대량의 면직물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은 인도와 미국 남부 등지의 광대한 목화 재배지로부터 목화를 수입하여 방적 공업을 급속히 발전시켰습니다. 면직물은 이전까지 귀족들의 비단이나 모직에 비해 값싸고 실용적인 옷감으로 각광받았고, 중산층과 서민층까지 폭넓게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새하얀 면직물에 색을 입히려는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당시까지 색깔을 내는 염료는 자연에서 얻는 것에 의존했기 때문에 색상 선택이 제한적이고 가격도 비쌌습니다.
초기의 염료는 쪽풀에서 얻는 인디고 블루, 꼭두서니 뿌리에서 추출한 앨리자린 레드, 동남아와 남미에서 나는 코치닐의 심홍색 등 자연산 물질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천연 염료들은 적은 양밖에 얻지 못하고 채취·추출 과정도 비효율적이어서 값비싼 사치품 취급을 받았습니다. 밝고 선명한 색 옷은 부유층의 상징이었고, 일반인들은 염색하지 않은 무채색 옷감이나 물이 쉽게 빠지는 옅은 빛깔의 옷을 입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산업혁명으로 대량 생산된 값싼 면직물이 보급되고, 군대에서조차 제복을 맞추려면 막대한 염료가 필요해지자, 더 저렴하고 풍부한 색채를 제공할 새로운 염료의 개발이 절실해졌습니다. 이 절박한 수요가 곧 화학 연구의 커다란 동력이 되었습니다.
합성 염료의 탄생과 독일 염료 화학의 발전

1856년, 영국 런던의 18세 청년 화학자 윌리엄 헨리 퍼킨은 집에서 말라리아 치료제인 키니네를 합성하려다 우연한 발견을 합니다. 석탄 타르에서 얻은 아닐린이라는 물질로 실험을 하던 중 그가 얻은 검은 침전물을 알코올에 녹였더니 아름다운 보랏빛 용액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용액은 견사와 면직물을 선명한 자주색으로 물들이는데, 빛에도 잘 바래지 않는 놀라운 특성을 보였습니다. 퍼킨이 발견한 세계 최초의 합성 염료 ‘모브’(Mauve)의 탄생이었습니다. 퍼킨은 곧 이 염료를 특허내고 공장을 세워 대량 생산에 나섰습니다. 값비싼 자연산 자줏빛 염료를 대체할 수 있게 되자 모브 염료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프랑스의 황후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까지도 모브 색 드레스를 애용할 정도로 사회적 화제가 되었습니다.
퍼킨의 성공은 촉매제가 되어, 전 세계 화학자들이 석탄 타르에서 수많은 색상의 새로운 합성 염료를 찾아내는 경쟁에 뛰어들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독일에서는 대학과 산업계가 긴밀히 협력하면서 염료 화학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영국은 퍼킨 이후 정부의 지원이나 특허 제도 면에서 화학 산업 육성이 미흡했지만, 독일은 우수한 화학 인재를 양성하고 연구를 장려하여 염료 분야에서 앞서나갔습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독일에는 바이엘(Bayer), BASF, 호크스트(Hoechst)와 같은 기업들이 설립되어 석탄 타르로부터 다양한 유기 화합물을 합성하고 새로운 염료를 쏟아냈습니다. 1860년대에 이미 합성 앨리자린 염료가 개발되어 천연 염료 산업을 붕괴시켰고, 1870~80년대에는 화학자 아돌프 폰 바이어가 식물에서만 얻던 남색 염료 인디고의 화학 구조를 밝혀내 합성에 성공했습니다. BASF에서는 막대한 연구 개발 투자를 통해 1897년에 인디고의 공업적 생산 공정을 완성하였고, 이로써 인도 등 식민지에서 재배하던 천연 인디고 산업은 순식간에 몰락했습니다.
이처럼 독일의 합성 염료 산업은 19세기 후반 세계 시장을 석권했습니다. 연구실에서 출발한 염료는 이제 대규모 공장에서 생산되어 전 세계로 수출되었고, 독일은 염료 분야의 “공장으로 된 세계의 염색공”이라 불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1913년 무렵 독일은 연간 13만 톤이 넘는 합성 염료를 수출하여, 5천 톤 남짓을 수출하던 영국과의 격차를 수십 배로 벌려 놓았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영국군의 군복에 필요한 카키색 염료조차 독일에서 몰래 들여와야 했다는 일화는 영국이 얼마나 염료 화학에서 뒤처져 있었는지 보여줍니다. 그 반면 독일의 화학 기업들은 막대한 이윤을 거두며 성장하였고, 합성 염료 기술을 바탕으로 다른 화학 제품들까지 범위를 넓혀갔습니다. 폭약, 비료, 사진 필름, 합성 섬유 등 여러 분야로 사업을 확장한 이들 화학 회사들은 곧 또 하나의 새로운 영역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의료용 약품, 그중에서도 합성 의약품의 가능성이 염료 화학자들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염료에서 찾은 약물 개발의 단서
합성 염료 화학의 발전은 의약품 개발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습니다. 우선, 염료를 만들던 화학자들은 다양한 유기 화합물을 합성하고 변형시키는 방법론을 개척하여, 복잡한 화학 구조를 다룰 수 있는 전문 지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물질의 합성과 생산에 능숙했기 때문에, 염료 외에 약효를 지닌 화합물을 만들어낼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염료 연구의 과정에서 얻은 중요한 통찰이 있었는데, 염료 분자들이 선택적으로 특정 물질이나 조직에 결합한다는 사실입니다. 현미경이 발명되고 세균학과 조직학이 발전하던 19세기 후반, 의사이자 과학자들은 염료를 단순히 직물에 색을 내는 데만 쓰지 않고 생물학 연구에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세포나 세균을 염색하면 투명한 조직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병리학자들은 여러 색소를 시험하여 조직의 특정 부분이나 특정 미생물만 물들이는 염색 기법을 개발했습니다.
이를 통해 혈액 속 다양한 백혈구의 모습이 처음 구별되었고, 결핵균 같은 병원균을 조직 내에서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특히 파울 에를리히(Paul Ehrlich)라는 젊은 독일 의학도는 염색약에 유별난 호기심과 재능을 보였습니다. 1870년대 에를리히는 의대 재학 중에 각종 아닐린 계열 염료로 조직 표본을 물들이는 실험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백혈구를 염색하여 호산구, 호중구, 호염구처럼 서로 다른 염색 성질에 따라 백혈구 종류를 구분하는 방법을 알아냈고, 이 공로로 당대에 혈액학과 조직학의 선구적인 발견을 이루었습니다. 에를리히는 이 경험을 통해 “어떤 화학 물질은 특정 세포와 강하게 결합하는 반면 다른 세포와는 친화성을 보이지 않는다”는 원리를 체득했습니다. 쉽게 말해, 염료 하나를 몸에 넣었을 때 염료가 몸속 여기저기 퍼지지만 유독 어떤 장기나 세포에만 달라붙는 현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보고 “우리도 원하는 표적만 골라 작용하는 물질을 만든다면 병균만 공격하고 인체 세포에는 해를 주지 않는 꿈의 치료제가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기발한 착상을 하게 됩니다. 훗날 그는 이러한 이상적인 치료제를 “마법의 탄환(zauberkugel)”, 즉 Magic Bullet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마치 총알 한 발로 목표물만 정확히 맞추듯, 몸속에 주입한 약물이 질병의 원인만 정밀 타격하여 치료하는 개념입니다.
당시 에를리히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염료의 약리 작용에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몇몇 염료는 단순히 착색되는 데 그치지 않고 미생물을 죽이거나 생리적 변화를 일으키는 효과를 보였습니다. 예를 들어, 에를리히는 메틸렌 블루라는 푸른색 염료로 말라리아 환자를 치료해보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메틸렌 블루는 독일 화학자들이 합성해낸 염료로 원래 직물 염색용이었지만, 에를리히는 이 물질을 환자에게 투여하여 말라리아를 일으키는 원생생물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다는 관찰을 남겼습니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아닐린 옐로 염료가 농양을 일으키는 세균을 죽였다는 보고도 나왔습니다. 이렇듯 염료 화합물 중 일부는 항균 작용을 띠었고, 이는 곧바로 “특정 염료처럼 특정 병원균만 선택적으로 공격하는 약물을 개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해주었습니다.
파울 에를리히와 ‘마법의 탄환’ 살바르산의 탄생
1900년대를 앞둔 시기, 인류는 세균성 감염병에 거의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매독, 결핵, 콜레라 같은 질병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지만 이를 근본적으로 치료할 약이 없었습니다. 세균 감염 치료로는 살균 소독법이나 면역 혈청 요법이 초보적으로 쓰일 뿐이었고, 말라리아에는 기나나무에서 추출한 천연 물질인 키니네가 유일한 특효약이었습니다. 당시 사용되던 아스피린이나 페나세틴 같은 약들은 해열과 진통 같은 증상 완화제일 뿐이었습니다. “몸 안의 병균만 골라 공격하는 화학물질”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발상이었습니다. 파울 에를리히는 바로 이 길을 개척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세포 염색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화학 지식을 바탕으로, 감염병을 화학 물질로 치료하는 새로운 의학에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에를리히는 먼저 아프리카수면병을 일으키는 기생충 트리파노소마를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이 질병은 체체파리가 옮기는 원충 감염으로 치명적이었는데, 마침 프랑스의 미생물학자 라브랑(Alphonse Laveran)이 비소 화합물을 이용해 트리파노소마를 일부 죽일 수 있다는 발표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비소는 맹독성 원소였지만, 적절히 쓰면 기생충을 해칠 수 있으리라는 실마리를 제공했습니다. 에를리히는 이 아이디어에 착안하여, “독을 독으로 제압한다”는 각오로 직접 약물 탐색에 나섰습니다. 그는 수년간 자신이 갈고닦은 염료 분석 능력을 총동원하여 500종이 넘는 합성 화합물을 하나하나 실험했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말하는 신약 후보 물질에 대한 ‘스크리닝’ 작업을 세계 최초로 수행한 것입니다. 그의 연구실에서는 염료 화합물은 물론 다양한 유기 비소 화합물들이 합성되었고, 매번 실험 동물에 주사하여 트리파노소마를 죽이는 효과가 있는지, 독성은 어떤지를 관찰했습니다.
초반에는 부분적인 성공과 좌절이 교차했습니다. 빨간색 염료 트리판 레드는 기생충을 어느 정도 억제했지만 금세 내성이 생겨 약효가 사라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병원체도 약에 적응해 저항성을 갖게 된다는, 약물 내성의 개념이 처음 확인되었습니다. 독성이 약한 비소제인 아톡실(Atoxyl)도 시험해보았지만 충분한 효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에를리히의 연구팀은 화합물의 구조를 조금씩 바꾸어가며 미세한 변화를 지닌 유사한 물질 수백 종을 합성했고, 일일이 활성을 시험했습니다. 그렇게 실패를 거듭하던 중, 마침내 606번째 화합물에서 결정적 성과가 나왔습니다. 1907년, 에를리히 연구소의 화학자 알프레드 베르트하임이 합성한 유기비소 화합물 하나가 실험동물의 트리파노소마를 깨끗이 사멸시킨 것입니다. 이 물질의 이름은 아르스페나민(Arsphenamine), 연구실 코드명 “화합물 606번”이었습니다. 기쁨도 잠시, 에를리히는 곧바로 이 성과를 다음 목표인 매독균에 응용하고자 했습니다.
1905년 독일의 미생물학자들이 매독의 원인균인 트레포네마 팔리둠(Treponema pallidum)을 발견했는데, 현미경으로 본 그 모습이 트리파노소마와 흡사한 나선형이었습니다. 에를리히는 “트리파노소마를 잡은 그 화합물이라면 혹시 매독균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606번 화합물을 매독에 시험해보기로 합니다. 마침 그의 연구소에 합류한 일본인 세균학자 하타 사하치로(秦佐八郎)가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토끼에 매독균을 감염시킨 뒤 606번 약물을 투여한 결과, 단 한 번의 주사로도 균이 소멸되는 놀라운 효과가 확인되었습니다. 이어 진행된 말기 매독 환자 50명 대상 임상 시험에서도 상당수 환자의 매독 증상이 눈에 띄게 호전되는 기적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마침내 1910년, 606번 화합물은 ‘살바르산(Salvarsan)’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살바르산은 ‘구원’을 뜻하는 라틴어 salvare와 비소(Arsenic)의 합성어로서, 오랫동안 인류를 고통에 빠뜨린 매독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물질이라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하지만 이 의약품도 나중에 페니셀린이 나오면서 완전히 대체되었습니다.

살바르산의 등장은 의학계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현대적 의미의 첫 “화학요법(chemotherapy)” 약물, 즉 특정 세균만 골라 공격하는 표적 치료제의 탄생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 감염병 치료제라 하면 독성 물질로 세균을 죽이려다 사람까지 해치는 양날의 검 같은 것이거나 그마저도 효과가 불확실했는데, 살바르산은 과학적으로 합성된 정밀 약물로서 병균에 맞는 “마법의 탄환”을 구현한 사례로 여겨졌습니다. 독일 화학 기업 호크스트(Hoechst)의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살바르산은 출시되자마자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갔고,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블록버스터” 약품이 되었습니다. 부작용과 투여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살바르산은 기존의 수은 요법에 비해 월등히 안전하고 효과적이어서 수많은 환자들을 구했습니다. 에를리히는 살바르산이 완벽한 치료제는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약의 품질 관리와 올바른 투여법을 알리는 데도 힘썼습니다. 그는 더 나은 제제를 찾기 위해 연구를 이어갔고, 결국 1912년에 이전보다 용해도가 높고 부작용이 적은 개선형 비소제 네오살바르산(Neosalvarsan)도 개발해 내놓았습니다.
살바르산의 성공으로 에를리히의 별명은 “현대 의학의 마탄의 사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학생 시절부터 시작된 염료 연구의 길을 통해 “약물 표적화”라는 개념을 처음 현실에 구현했고, 이는 이후 약학과 의학 연구의 지대한 방향성을 제시했습니다. 에를리히 자신도 “화학요법”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이러한 화학적 치료의 새 시대를 선언했습니다. 그의 업적을 계기로 인공 합성된 화합물로 질병을 정복하려는 인류의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염료 화학에서 현대 제약 산업으로의 확장
살바르산으로 상징되는 20세기 초의 사건은 화학 염료 산업이 제약 산업으로 뻗어나가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에를리히의 연구 성과는 개인의 실험실에 머무르지 않고 곧장 산업계와 연결되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살바르산의 생산을 맡은 곳은 독일의 거대 염료 회사 호크스트였고, 에를리히는 그들과 긴밀히 협력하여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또한 다른 독일 화학 기업들 역시 염료 합성 기술을 바탕으로 의약품 개발에 속속 뛰어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염료 제조로 성장한 바이엘 사에서는 1899년 세계 최초의 합성 진통제이자 소염제인 아스피린을 출시하여 의약품 시장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 외에도 페나세틴, 안티피린 등 석탄 타르 유래 화학물질로 만든 초기의 의약품들이 잇달아 개발되어 통증과 발열을 가라앉히는 데 쓰였습니다. 이들 신약 개발은 모두 염료 산업에서 확보된 유기 합성 기술의 축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일련의 성공을 통해 “석탄 타르 색소야말로 약효의 보고”라는 인식이 퍼졌고, 화학 기업들은 본격적으로 제약 분야를 미래의 성장 동력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1910년대 이후에도 합성 의약품 개발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에를리히의 업적에 자극받은 과학자들은 다른 감염병에도 적용할 치료제를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1930년대 중반, 독일 바이엘의 연구원 게르하르트 도마크는 붉은 아조 염료 물질을 연구하다가 프론토실(Prontosil)이라는 화합물이 패혈증의 원인균을 효과적으로 죽인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프론토실은 실험용 염료처럼 보이는 빨간 물질이었지만 동물 실험과 임상에서 각종 세균 감염을 치료하는 능력을 보여주었고, 이것이 바로 최초의 설파제(sulfa drug), 즉 광범위 항균제의 탄생이었습니다. 프론토실의 성공으로 항생제 시대의 막이 열리며, 이후 페니실린과 스트렙토마이신 같은 자연 유래 항생제까지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보다 앞서 합성 염료에서 출발한 살바르산과 설파제가 인류 최초의 전격적인 세균 정복 약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돌이켜보면, 현대 제약 산업의 뿌리는 19세기 염료 화학 산업에 닿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값싼 면직물을 물들이기 위해 시작된 합성 염료 연구가, 우연과 필연이 교차한 과학사의 흐름 속에서 인류를 질병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열쇠를 제공하게 된 것입니다. 석탄에서 추출한 시커먼 타르는 더러운 폐기물이 아니라 수천 가지 신비로운 분자의 보고였고, 이를 활용한 염색산업은 다시 인류의 생명을 구하는 의약품 산업으로 꽃피웠습니다. 목화에서 실을 뽑고, 그 실을 화려하게 물들인 염료의 시대를 거쳐, 마침내 그 염료를 응용한 약물이 병을 고치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식민지의 원료 공급지에서 시작된 면직물-염료-의약품의 연결고리는 과학기술과 산업, 의학의 경이로운 진화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합성 의약품들은 그 기원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돌아볼 때, 아주 사소해 보였던 염료 한 병에서 “마법의 탄환”이 솟아나온 바로 그 역사의 연장선상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식민지를 가진 나라는 영국이었는데, 염색을 발전시킨 나라는 독일이라는 것입니다. 풍요속에도 빈곤함이 있어서 과학이 발전하는 것 같습니다.
TMI
파울 에를리히(Paul Ehrlich)는 살바르산(사람에게 처음으로 사용된 화학요법제)을 개발한 이후, 항암제 개발에도 도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에를리히는 말기까지 "마법의 탄환(Magic Bullet)" 개념을 확장해 암세포만 선택적으로 죽이는 약물을 개발하려 했습니다. 그는 특정 아조염료 계열이나 염료 유도체가 종양 세포에 축적되는 현상에 주목했으며, 이를 토대로 세포독성 물질을 암세포에 전달하는 방식을 구상했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항암 표적치료제 개념과 유사하지만, 당시에는 기술적 한계가 너무 컸습니다.
결국 그가 시도한 여러 화합물은 실험동물에서조차 뚜렷한 치료 효과를 보이지 않았고, 효능과 독성의 균형을 맞추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는 1915년 사망하기 전까지도 항암제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생전에는 이를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즉, 에를리히는 현대 항암 화학요법의 개념을 선구적으로 제시했으나, 실제 약물 개발에는 실패한 셈입니다.
살바르산 개발에는 일본인 세균학자인 하타 사하치로(Sahachiro Hata)와 협력해 진행되었지만 외국 논문에서는 일본학자의 이름이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참고문헌
- K.J. Williams. “The introduction of ‘chemotherapy’ using arsphenamine – the first magic bullet.” Journal of the Royal Society of Medicine, 2009. (파울 에를리히와 살바르산에 대한 역사적 고찰)
- Amanda Yarnell. “Salvarsan.” Chemical & Engineering News, Vol. 83, Issue 25, 2005. (에를리히의 살바르산 개발과 의의에 대한 기사)
- 박지욱. 「마탄의 사수, 에를리히를 아시나요?」 메디포뉴스, 2015-08-27. (파울 에를리히의 생애와 업적을 다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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