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반, 미국의 의학자 바루크 S. 블룸버그(Baruch S. Blumberg) 박사는 인류집단 간 질병 민감성의 유전적 차이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다양한 인구 집단의 혈청 샘플을 수집하고자 세계 여러 지역을 다녔으며, 이 과정에서 혈액은행과 협력하여 다량의 수혈을 받은 혈우병 환자들의 혈청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블룸버그 박사는 다회 수혈로 인해 환자들의 체내에 자신이 유전적으로 가지지 않은 외래 단백질(항원)이 축적되었을 것이라고 가정했습니다. 즉 혈우병 환자들이 생산한 항체를 이용해, 전 세계 혈청 샘플 속에서 이 항원들과 대응하는 항체 반응을 탐색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러한 탐구 중 뜻밖의 발견이 있었습니다. 1963년경 뉴욕의 혈우병 환자 혈청을 검사하던 연구팀은 실험 패널 가운데 한 표본과 강한 항원-항체 반응(precipitin band)이 나타났음을 관찰했습니다. 조사 결과 그 혈청 표본은 호주 원주민(Aborigine)의 혈액 샘플이었고, 대응하는 항체는 한 미국 혈우병 환자의 혈청에 들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블룸버그는 이 새로운 항원을 ‘호주항원(Australia antigen, Au)’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항원은 이후 B형 간염 바이러스의 표면항원(HBsAg)으로 확인되었고, 블룸버그 박사는 이 발견으로 1976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혈청형 분석과 호주항원의 발견
호주항원의 발견은 철저한 혈청형(serotype) 분석의 산물이었습니다. 블룸버그 연구팀은 혈청 은행에 보관된 샘플을 활용해 다양한 인구 집단과 질병군에서 Au의 분포를 조사했습니다. 예를 들어 동일 연구에서는 다운증후군 환자나 백혈병 환자 등에서 Au 보유 비율을 분석하여, Au가 특정 인구에 편중되지 않는지 탐색했습니다. 또한 블룸버그 박사는 호주 항원 샘플을 더 확보하기 위해 직접 서호주 현지에 파견되어 대량의 혈청 샘플을 수집·시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블룸버그 박사는 연구 초기부터 “B형 간염의 원인을 찾기 위한 목표”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혈청 다형성(polymorphism)에 대한 호기심으로 실험을 진행했으며, 미리 정해진 목표 없이 연구가 진행된 결과 우연히 간염과 연관된 단백질을 발견했다고 설명합니다. 이를 토대로, 블룸버그 박사는 뒤늦게 자신의 발견이 전염성 질환의 열쇠일 수 있음을 깨닫고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간염과의 연관성 규명
호주항원의 존재 이유를 밝히기 위해 연구팀은 다양한 힌트를 모았습니다. 우선 수혈 환자들에서 Au가 흔히 관찰됨을 주목했습니다. 비정상적으로 많은 양의 Au가 관찰된 혈액질환자 중에는 다량의 수혈을 받은 지중해 빈혈(Thalassemia)이나 혈우병 환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블룸버그는 이들이 수혈 과정에서 바이러스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을 의심했습니다. 그는 “Au가 적혈구 보관액에 있거나, 아니면 수혈로 주입된 바이러스 때문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Au가 ‘바이러스성 간염’의 병원체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1966년 6월, 메릴랜드주 국립암연구소의 임상연구실에서 간염 증상을 보이던 환자가 입원했고, 이 환자는 수혈성 간염으로 진단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블룸버그 연구팀은 Au와 간염의 연관성 검증 실험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초기 실험에서 급성 바이러스 간염 환자의 혈액에서 Au가 흔히 검출되지만 며칠 내에 사라짐을 발견했습니다.
또한 연구실의 여성 기술자는 호주항원 분리 작업 중 자신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967년 4월, 그녀는 스스로 채취한 혈청에서 희미한 양성 반응선을 확인했고, 검사 다음날 실제로 황달을 수반한 급성 간염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이 사례는 Au 혈액 검사가 처음으로 급성 간염 진단에 활용된 예가 되었습니다.
블룸버그 팀은 1966년 말까지 여러 코호트 연구를 통해 Au가 급성 바이러스 간염 환자에서 빈번하게 발견됨을 확인했고, 이를 1967년 논문으로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는 초기에는 학계에서 곧바로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당시 간염의 원인이 밝혀졌다는 주장이 이미 여러 차례 제기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블룸버그 팀의 논문은 한때 학술지에서 거절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곧 일본 도쿄대의 카주오 오코치 교수 그룹이 이 결과를 독립적으로 재현했습니다. 오코치 교수는 혈액학자로서 비슷한 항원-항체 연구를 진행하던 중 Au와 반응하는 혈청을 발견했고, 이 혈청과 Au를 비교분석하여 둘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더 나아가 오코치 교수는 Au를 보유한 혈액을 수혈하는 실험을 통해 Au가 수혈 수혜자에게 간염을 유발한다는 결정적 증거를 얻었습니다.
이러한 연구들로 Au와 B형 간염의 인과관계가 확실해지자, 미국과 일본의 여러 병원에서는 Au 양성 혈액의 수혈을 중단하기 시작했습니다.
B형 간염 바이러스는 약 42nm 크기의 이중 피막을 가진 구형 입자로, 내부에 HBcAg로 불리는 핵심항원과 부분 이중가닥 DNA를 포함합니다. 외피의 표면에는 과잉으로 합성된 바이러스 껍질 단백질, 즉 표면항원(HBsAg)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블룸버그 연구팀은 호주항원이 바로 이 HBsAg임을 밝혀냈으며, 이후 알프레드 프린스 등 후속 연구자들도 Au와 간염의 연관성을 추가로 입증했습니다.
백신 개발과 보건적 영향
B형 간염 바이러스의 발견은 백신 개발로도 이어졌습니다. 블룸버그 박사와 그의 동료 어윈 밀먼(Irving Millman) 박사는 1969년에 세계 최초의 B형 간염 백신을 개발했습니다. 이후 1971년에 혈액 검사법이 본격 도입되었고, 1981년에는 메르크 제약이 혈장 유래 불활성화 백신을 상용화했으며, 1986년에는 유전자재조합 방식의 백신이 개발되어 전 세계에 보급되었습니다. 이로써 B형 간염 예방접종이 가능해졌고, 만성 B형 간염 및 간암 발생률을 크게 줄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블룸버그 박사의 연구 성과는 단순히 새로운 바이러스의 발견을 넘어, 간염 방역에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그의 발견으로 B형 간염 바이러스의 구조와 전파 경로가 규명되었으며, 위생적 수혈과 백신 접종이라는 선제적 예방책이 확립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매년 7월 28일은 블룸버그 박사의 생일을 기념하여 ‘세계 간염의 날’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고집스러운 의학 탐구와 우연한 발견이 결합되어, 바룩 S. 블룸버그 박사는 인류의 건강에 큰 공헌을 남겼습니다.
참고문헌
- Blumberg BS. Australia antigen and the biology of hepatitis B. Science. 1977.
- Prince AM. An antigen detected in the blood during the incubation period of serum hepatitis. Proc Natl Acad Sci. 1968.
- Okochi K, Murakami S. Transmission of serum hepatitis by the homologous and heterologous inoculation of Au-positive blood. Vox Sang. 1969.
- NobelPrize.org. The Nobel Prize in Physiology or Medicine 1976 – Baruch S. Blumberg.
- Baruch S. Blumberg. Hepatitis B and the prevention of cancer: a personal memoir. Cancer Res. 1982.
- London WT, Sutnick AI, Blumberg BS. Australia antigen and hepatitis. Annals of Internal Medicine.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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