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 후반의 프랑스와 유럽은 콜레라, 홍역, 발진티푸스, 매독, 탄저병, 광견병 등 다양한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유행하면서 큰 사회적 공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당시에는 에드워드 제너가 1796년에 발견한 천연두 백신(牛痘 기반)만이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그 외의 감염병에 대한 효과적인 예방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루이 파스퇴르는 미생물을 배양하여 병원성을 약화시키는 ‘약독화(attenuation)’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으며, 이를 여러 병원체에 적용하여 백신을 개발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1879년에 닭 콜레라 백신을 개발한 데 이어, 1881년에는 탄저병 백신을, 1885년에는 광견병 백신을 성공적으로 개발하여 예방의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탄저병 백신 개발
탄저병(Bacillus anthracis 감염)은 주로 가축에게 발생하는 질병으로, ‘탄저’라는 명칭은 그리스어로 ‘석탄(carbuncle)’을 뜻합니다. 1876년에는 로베르 코흐가 탄저균이 동물과 인간의 질병을 유발하는 원인임을 입증함으로써 인류 과학사에 중대한 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당시 농업이 중요한 산업이었던 프랑스에서는 양, 소, 말 등이 매년 수만 마리씩 탄저병으로 폐사하였기 때문에, 파스퇴르와 그의 동료들은 1880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백신 개발에 착수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앙리 뚜쌍(Henri Toussaint) 등 수의학자들은 탄저균을 55℃에서 가열하여 사균 백신을 제조한 뒤 개와 양에게 시험하였으나, 대중의 관심을 크게 끌지는 못하였습니다. 파스퇴르는 자신의 잉여균을 장기간 산소에 노출시키며 43℃에서 배양함으로써 병원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약독화 방식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1880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연설에서 “감염된 미생물의 배양 조건을 바꾸면 병원성을 낮출 수 있다”고 주장하며, 전염병 백신의 가능성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습니다.
파스퇴르는 이러한 이론을 실험으로 증명하기 위해, 1881년 5월 프랑스 멜룬 근교의 푸이이-르-포르(Pouilly-le-Fort) 농장에서 공개 실험을 계획하였습니다. 실험 설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실험 대상: 프랑스 농업협회가 제공한 양 60마리를 준비하였으며, 이 중 10마리는 무처리 대조군으로 남기고 나머지 50마리는 실험군 25마리와 비교군 25마리로 구분하였습니다. 추가로, 젖소 8마리와 일반 소 2마리를 포함한 소 10마리도 제공받아 백신 효과를 검증하였습니다.
- 백신 접종: 실험군의 양 25마리에게는 약독화된 탄저균을 5월 5일과 5월 17일 두 차례 접종하였습니다. 소 6마리도 같은 일정으로 접종하였고, 나머지 소 4마리는 접종하지 않은 비교군으로 설정하였습니다.
- 감염 유도: 5월 31일에는 백신 접종군과 비교군 모두에게 고병원성 탄저균을 피하 주사하여 감염을 유도하였습니다. 파스퇴르는 이 실험에서 백신군은 생존하고, 미접종군은 전멸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 결과 평가: 접종 후 48시간이 지난 6월 2일에 확인한 결과, 백신을 접종한 양 24마리(염소 1두 포함)와 젖소 6마리는 모두 건강하였으며, 미접종군의 양 25마리와 염소 1두 중 21마리가 폐사하였습니다. 이후 남은 4마리의 미접종 양도 같은 날 저녁 전원 폐사하였습니다. 미접종 소 4두는 즉각적인 치명 반응은 없었으나 접종 부위에 심한 부종과 고열이 나타났고, 이후에도 증상이 지속되었습니다. 반면 백신을 접종한 소는 아무런 증상도 보이지 않았으며, 식욕과 활력도 정상 수준을 유지하였습니다. 백신군에서는 임신 중이던 양 한 마리가 태아 사망으로 인해 사망하였으나, 직접적인 질병에 의한 폐사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이 실험 결과에 대해 파스퇴르는 “이제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질병으로부터 동물을 구할 수 있는 백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하지만 과학계 내에서는 백신 제조법과 개발 우선권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습니다. 파스퇴르는 실험에 생균 백신을 사용했다고 주장하였지만, 실제로는 투센의 화학적 사균 백신(크롬산칼륨 처리)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로 인해 수의학계에서는 투센이 사실상 최초의 탄저병 백신 개발자라는 평가가 등장하였고, 1998년에는 프랑스 정부가 투센의 백신을 공식적으로 최초 백신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로베르 코흐를 비롯한 일부 동시대 과학자들도 투센의 공로를 인정하며 파스퇴르의 주장을 의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스퇴르의 실험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881년 6월 2일의 공개 실험에는 정부 관료, 언론인, 수의사, 지역 농장주 등 약 200명이 참관하였으며, 그 중 백신에 회의적이던 수의사들조차 실험 결과를 확인한 뒤 열렬한 지지자로 돌아섰습니다. 이 실험을 계기로 프랑스 농업계에서는 탄저병 백신의 중요성이 널리 인식되었으며, 파스퇴르는 백신 배양 및 유통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초기의 생균 방식 대신, 유전자 재조합 기술로 제조된 보호항원(Protective Antigen)을 이용한 사백신이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미국 FDA가 1970년에 승인한 ‘Anthrax Vaccine Adsorbed(AVA)’가 있으며, 이는 군인이나 가죽업자 등 고위험 직군을 대상으로 접종되고 있습니다.
광견병 백신 개발
광견병(rabies)은 중추신경계를 침범하는 질환으로, 한 번 발병하면 치사율이 거의 100%에 이르는 매우 치명적인 질병입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특히 들개나 야생동물의 공격이 빈번하였으며, 물린 부위에 상처가 생기면 사람들은 사실상 사망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파스퇴르는 1880년경부터 광견병을 본격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당시 광견병의 병원체는 현미경으로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였으며, 파스퇴르와 동료 과학자인 에밀 루(Émile Roux)는 감염된 개의 뇌를 추출하여 이를 다른 개의 뇌에 접종하는 실험을 통해 병원성이 전파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이후 파스퇴르는 토끼를 반복적으로 감염시켜 광견병 바이러스의 생존 기간을 파악하고자 하였고, 건조한 환경에서 뇌척수액이 굳을 때까지 두었을 경우 바이러스의 독성이 점차 약화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건조시킨 뇌척수액’을 이용한 사백신 제조법을 고안하였습니다. 즉, 광견병에 감염된 토끼의 척수 일부를 통풍이 잘 되는 용기에 넣어 건조시켜 바이러스를 약화시킨 후, 이를 사람이나 동물에게 단계적으로 접종하는 방식입니다.
파스퇴르는 개와 토끼를 대상으로 한 초기 실험에서 건조된 뇌조직을 투여한 결과, 이들이 광견병에 걸리지 않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1884년 2월 25일에는 이 성과를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 발표하였고, 위원회의 공식 검증을 받았습니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예방 접종은 1885년에 이루어졌습니다. 같은 해 7월 6일, 알자스 지역의 9세 소년 요제프 마이스터(Joseph Meister)가 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14군데나 물리는 사고를 당한 뒤, 파스퇴르에게 이송되었습니다. 당시 파스퇴르는 의사 면허가 없었으며, 그의 동료인 루(Émile Roux) 역시 인간 대상 실험에 반대하여 참여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결핵 전문의 출신의 협력자 자크 그랑셰(Jacques Joseph Grancher) 박사가 치료 결정을 설득하였고, 이에 따라 백신 투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랑셰 박사는 총 10일간, 매일 12회씩 총 13회의 백신을 접종하였습니다. 접종은 고독성 바이러스에서 시작하여 점차 약독화된 백신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마이스터는 광견병에 걸리지 않았고, 인류 최초의 인체 광견병 백신 접종 사례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파스퇴르는 이 사실을 언론에 곧바로 공개하지 않았으며, 이후 15세 소년 장-바티스트 쥬필(Jean-Baptiste Jupille)의 치료에 성공한 후 대중에게 이를 발표하였습니다.
이 소식은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퍼졌으며, 광견병 환자와 노출자는 세계 각지에서 파스퇴르 연구소를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파스퇴르는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임시 예방접종소를 마련하고 운영하였습니다. 같은 해 11월에는 프랑스 대통령 사디 카르노가 그랑셰 박사를 레지옹 도뇌르 기사단 대십자로 임명하였고, 1888년에는 파리 시내 루브르 인근에 파스퇴르 연구소(Institut Pasteur)가 정식 설립되어 백신 연구와 보급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현대의 광견병 백신은 파스퇴르 방식의 생백신이 아니라, 세포배양된 광견병 바이러스를 화학적으로 불활성화한 사백신을 사용합니다. 여러 차례의 접종을 통해 중화항체를 형성하며, WHO 지침에 따르면 사람은 노출 전 예방접종과 노출 후 치료(상처 소독, 면역글로불린 투여, 3~4회의 백신 접종)를 모두 받을 수 있습니다. 이들 백신은 바이러스 표면의 G당 단백질을 주요 항원으로 삼아 중화항체를 유도하며, 교차보호 효과도 제공합니다. G당 단백질은 광견병 바이러스의 주요 보호 항원입니다.
19세기 사회 분위기: 전염병과 백신
19세기 유럽은 전염병의 공포와 백신에 대한 희망이 교차하던 시대였습니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위생 상태는 열악해졌고, 그 결과 콜레라, 장티푸스, 흑사병과 같은 감염병이 주기적으로 대유행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질병에 대해 의학적 개입 없이는 대응할 수 없다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파스퇴르가 활동하던 당시 주요 전염병에는 소아마비, 홍역, 매독, 탄저병, 광견병, 우역(牛疫, cattle plague) 등이 있었으며, 파스퇴르는 이들 질병을 “인간과 가축에게 반복적으로 닥치는 재앙”이라고 표현하며 백신 개발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이미 천연두 백신은 널리 사용되고 있었지만, 기타 질병에 대해서는 예방 백신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백신에 대한 대중의 지식 역시 매우 부족하였습니다. 따라서 파스퇴르가 시행한 탄저병과 광견병 백신 실험은 학계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881년 탄저병 백신의 공개시험은 농민, 수의사, 정치인 등 수백 명이 참관한 가운데 진행되었으며, 그중 백신에 회의적이던 수의사들마저 실험 결과를 확인한 후 파스퇴르의 이론을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언론과 농업협회 역시 실험 성공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백신 접종 열풍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1885년 광견병 백신의 성공도 순식간에 알려졌고, 파스퇴르 연구소는 백신을 맞기 위해 방문한 사람들로 붐비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파스퇴르의 백신 개발은 국민 건강은 물론, 사회 전체의 신뢰를 이끌어낸 역사적인 사건이었으며, ‘예방접종(Vaccination)’이라는 용어 역시 파스퇴르가 1881년 국제 의학 대회에서 처음 제안한 이후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연구 윤리와 동물 실험
파스퇴르의 백신 연구는 혁신적인 성과를 이룬 동시에, 윤리적 논쟁도 불러일으켰습니다. 먼저 동물 실험과 관련된 논란이 있었습니다. 탄저병 백신 실험에서는 양, 염소, 소 등 수십 마리가, 광견병 백신 실험에서는 개와 토끼 등 수십 마리가 실험에 동원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동물 실험을 통한 의학적 진보를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강하였지만, 일부 지식인들은 실험을 위해 희생되는 동물의 수에 우려를 표하기도 하였습니다. 파스퇴르는 “동물을 희생시켜 인류를 구한다”는 신념 아래 실험을 강행하였고, 백신이 실제로 효과를 거두자 사회적 지지도 함께 높아졌습니다.
인체 적용과 관련된 윤리적 쟁점도 존재하였습니다. 파스퇴르는 의사 면허가 없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인간 환자에게 백신을 투여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요제프 마이스터에게 백신을 투여할 때도 파스퇴르 본인이 직접 주사를 놓지는 않았으며, 파스퇴르가 신뢰하던 소아과 전문의 자크 그랑셰가 전체 접종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랑셰는 이후 프랑스 의학원에서 파스퇴르를 변호하며, 접종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파스퇴르는 백신 조제법과 실험 과정을 외부에 비공개로 유지하였는데, 이로 인해 동료 과학자들로부터 “검증이 불가능한 비밀 기술”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파스퇴르는 이에 대해 “품질 관리를 위해서”라는 이유를 내세웠습니다. 더불어 마이스터 치료 이전에 파스퇴르가 수십 마리의 개를 대상으로 예비 시험을 했다고 보고하였으나, 사후 연구 노트 분석에 따르면 실제로 실험에 사용된 동물 수는 그보다 적었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파스퇴르의 연구는 당시의 과학계 윤리 기준은 물론, 현대의 시각에서도 복합적인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근대 백신학의 개척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의 연구 성과는 후대 과학자들에게도 깊은 신뢰와 자극을 주었습니다.
과학적 원리와 현대 백신 비교
파스퇴르가 개발한 두 백신에는 공통된 면역학적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의 탄저병 백신은 죽은 탄저균, 즉 사균 또는 약독화균을 체내에 주입함으로써 체액성 면역, 즉 B 세포가 매개하는 항체 면역을 유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생균 대신 병원성이 제거된 균주를 사용함으로써 실제 질병을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항원을 인식시켜 중화항체 생성을 유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광견병 백신은 단백질 항원 기반 백신에 해당합니다. 광견병 바이러스의 외피에는 G 단백질이 존재하는데, 이 G 단백질이 면역 반응을 유도하는 주요 항원, 즉 중화항원으로 작용합니다. 파스퇴르는 감염된 토끼의 뇌척수 조직을 건조시켜 바이러스의 독성을 점차 약화시키고, 이러한 조직을 연속적으로 접종함으로써 체내 면역계가 G 단백질에 대한 항체를 형성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항체는 실제로 광견병 바이러스가 체내에 침투할 경우 이를 중화하고 뇌로의 확산을 막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파스퇴르의 전략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원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현재 사용되는 탄저병 백신은 재조합 보호항원 단백질을 이용한 순수 항원 기반 사백신이며, 광견병 백신 역시 세포 배양된 바이러스를 화학적으로 불활성화시킨 사백신 형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들 백신 모두 숙주의 면역계가 특정 항원을 기억하도록 하여, 실제 감염 이전 또는 이후에 보호 면역을 제공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의 백신 개발 기술과 비교하면, 파스퇴르의 백신은 ‘약독화 백신’과 ‘사백신’ 전략의 원형에 해당합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전통적인 방식에 더하여 유전자 재조합 단백질 백신, 핵산 백신(mRNA 기반), 바이러스 벡터 백신 등 다양한 기술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파스퇴르가 제시한 항원 노출 → 중화항체 생성이라는 기본 면역 메커니즘은 여전히 변함없는 핵심 원리입니다.
예를 들어, 현대에도 광견병에 노출된 사람은 신속히 백신을 접종받아 중화항체를 형성함으로써 바이러스가 중추신경계로 침투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탄저병 역시 백신 접종을 통해 보호항원에 대한 항체가 형성되며, 이후 실제 감염이 발생하더라도 항체가 독소의 작용을 막아 감염 자체를 억제할 수 있습니다.
파스퇴르의 시대에 비해 백신의 안전성과 제조 속도, 품질 관리 수준은 크게 향상되었지만, 면역 반응의 기초 원리 자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동일한 기반 위에 놓여 있습니다.
종합하면, 파스퇴르의 탄저병 및 광견병 백신 개발은 수많은 동물 실험과 대중 앞에서 진행된 공개 시험을 통해 과학적 타당성을 입증하였으며, 당대의 사회와 과학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 과정에서 근대 백신학의 핵심 개념과 실천 전략이 정립되었고, 오늘날 백신 과학의 이론적 기반 또한 이 위에서 구축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파스퇴르의 도전은 인류가 전염병을 극복할 수 있다는 과학적 확신을 심어주었으며, 현재까지도 그 정신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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