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생유전학(Epigenetics)은 원래 세포생물학과 분자유전학의 전문 영역에서 사용되던 개념입니다. DNA 염기서열이 변하지 않아도
특정 유전자의 발현이 조절된다는 사실은 20세기 중반부터 학계에서 부분적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비교적 생소한 주제였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이 개념은 단순한 학문을 넘어 건강, 심리, 교육, 사회문화 전반을 관통하는 하나의 '문화적 키워드'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렇다면 후생유전학은 어떻게 과학자의 실험실을 떠나 대중의 언어로 확산되었을까요?
1. 시각적으로 강렬한 동물실험: 임신한 쥐의 식이와 새끼의 털 색 변화
2003년, 미국 듀크대학교의 랜디 저틀(Randy Jirtle)와 로버트 워터랜드(Robert Waterland) 연구팀은 후생유전학의 개념을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만든 대표적 실험을 발표했습니다. 아고티(Agouti) 유전자를 지닌 쥐에게 엽산, 비타민 B12, 콜린 등 메틸기 제공 영양소가 풍부한 식이를 제공한 결과, 출생한 새끼들의 털 색이 밝은 노란색에서 갈색으로 바뀌었고, 비만도 현저히 줄었습니다. DNA 염기서열은 동일했지만, 식이 환경이 DNA 메틸화 수준을 변화시켜 유전자 발현을 조절한 것입니다.
아고티 유전자를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일단 아고티는 남미에 살고 있는 설치류의 동물의 하나인데, 다 크면 60cm까지 자라는 동물입니다. 보통 동물은 아고티보다는 아구티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보통 아구티 그 자체는 유명하지 않지만, 아구티 유전자는 더 유명합니다. 이 유전자에 아구티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 동물의 털 때문이긴 한데, 이 동물의 털이 한가지 색이 아니라 털 하나에 띠 모양으로 검은색과 갈색이 섞여 있고, 이 두가지 색은 서로 다른 물질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특히 아고티 유전자는 이렇게 번갈아 색이 나오게 하는 배치를 하는 유전자입니다.
그런데 이 유전자를 과발현시키거나, 돌연변이가 일어나면 노란색이 강해지고, 이 동물은 비만, 당뇨, 종양 발생률 증가와 같은 생리적 문제도 동반됩니다. 이 돌연변이체를 Avy (viable yellow agouti)라고 하며, DNA 메틸화 수준에 따라 유전자 발현이 달라지고, 따라서 털 색도 다양하게 나타나는 대표적 후생유전학 모델입니다.
즉, 위의 말은 아고티 유전자에 필요한 것이 유전자에 표시를 하는 메틸기인데, 엽산이나 콜린 등은 바로 이 메틸기를 공급하는 물질입니다. 그래서 영양이 풍부하니까, 털의 색이 원래 쥐의 색처럼 돌아왔고, 건강해 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실험은 후생유전학이라는 개념을 매우 직관적으로 시각화해 보여주었고, 언론은 이를 "엄마의 식단이 아이의 유전자를 바꾼다"는 제목으로 보도하며 대중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나아가 "유전자는 운명이 아니다"라는 인식이 퍼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트라우마의 유전: 세대를 건너 전해진 상처
그런데 위의 사례는 그냥 영양에 맞춰서 유전자가 다르게 활성화된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는 문제라서 별 다른 충격이 없었는데, 후생유전학이 대중의 주목을 받게된 또 다른 계기는, 부모 세대의 외상 경험이 자녀 세대의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들이 발표되면서부터입니다. 이른바 '세대 간 트라우마 전이'라는 주제는 기존의 유전 개념으로 설명되지 않던 정서적 대물림 현상을 과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했고, 심리치료와 사회운동, 교육 담론으로까지 확산되었습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연구
2015년, 뉴욕 마운트 시나이 병원의 연구팀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후생유전학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스트레스 조절과 관련된 NR3C1 유전자의 메틸화 정도를 측정한 결과, 생존자의 자녀들에서는 메틸화 수준이 낮게 나타났습니다. 이는 스트레스 호르몬 조절 기능과 관련된 생화학적 변화로, 부모 세대의 극단적 외상이 자녀 세대의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이 연구는 언론을 통해 "조상의 고통이 후손의 유전자에 새겨진다"는 형태로 재해석되며 대중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네덜란드 기근기 연구
1944~45년 겨울, 네덜란드 서부 지역은 독일군의 봉쇄로 인해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렸습니다. 이 상황은 약 450만 명 피해, 18,000~22,000명 사망 했으며, 1일 배급량이 580kcal까지 감소했으며, 1945년 5월 연합군 해방으로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이때 임신했던 여성의 자녀들은 성인이 된 후 비만, 당뇨, 대사증후군의 위험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더 놀라운 점은, 이러한 영향이 2세대를 넘어 3세대까지도 통계적으로 관찰되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IGF2 유전자(인슐린 유사 성장인자 2)의 메틸화 수준은 기근기에 태어난 이들에게서 지속적으로 낮았으며, 이 유전자는 성장과 대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는 단순한 영양결핍이 아닌, 태아기 환경이 유전자 발현의 조절 구조 자체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강력한 사례로 주목받았습니다.
3. 대중서와 미디어의 파급: 후생유전학은 운명에 대한 반론
후생유전학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데에는 다양한 대중서와 미디어 콘텐츠의 역할도 컸습니다. 이들 콘텐츠는 과학적 발견을 보다 감정적이고 서사적인 언어로 번역하며 일반 독자에게 후생유전학을 '이해의 도구'로 소개했습니다.
- 브루스 립턴의 『믿음의 생물학(The Biology of Belief)』은 "신념이 유전자를 조절한다"는 메시지를 강조하며 후생유전학을 자기계발서와 접목시켰습니다.
- 니타 아라니의 『Epigenetics Revolution』은 암, 노화, 유전병 등과 관련된 후생유전학의 의학적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대중 과학서로 평가받습니다.
- 마크 울린의 『It Didn’t Start with You』는 조상의 트라우마가 후손의 정서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제를 심리치료 문맥으로 풀어내며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후 유튜브, TED 강연, 팟캐스트 등에서도 후생유전학은 '운명을 바꾸는 과학'이라는 내러티브를 갖게 되었고, 이는 "유전자는 정해진 것이 아니며, 나의 삶은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로 작용하였습니다.
정리하며
후생유전학은 본래 과학적 개념이지만, 대중에게는 곧 '상처는 유전될 수 있다', '운명은 바꿀 수 있다'는 형태의 서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정체성, 가족사, 심리치유에 목말라 있는 현대인에게 강한 감정적 울림을 주었습니다. 과학은 신중히 걸음을 옮기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 과학을 이미 삶의 언어로 받아들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후생유전학이 실제로 말하고 있는 것과, 대중문화 속에서 말하고 싶은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사이비적 왜곡과 과학적 가능성을 분별하는 첫걸음입니다.
요약: 후생유전학은 어떻게 '유행어'가 되었는가?
- 동물실험의 시각적 효과: Agouti 쥐 실험을 통해 유전자 발현이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줌
- 세대 간 트라우마 연구: 홀로코스트, 네덜란드 기근기 사례를 통해 인간에게도 후성유전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능성 제시
- 출판과 미디어의 확산: 자기계발서, 심리치유서, 대중과학서 등이 후생유전학을 삶의 해석 도구로 확산
- “운명은 바꿀 수 있다”는 서사: 유전자 결정론에 맞서는 희망의 메시지로 대중에게 호소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후성유전학을 이용해서 아무 것이나 연결해서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생활면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퍼미딘(spermidine) 영양제, 정말 효과가 있을까? - 지금은 아닐 듯 (1) | 2025.08.26 |
---|---|
하버드 식단 vs. USDA 식단 – USDA가 맞다고 본다 (3) | 2025.08.25 |
소비되는 산소와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로 무엇을 먹었는지 알 수 있다. (0) | 2025.08.20 |
카본블랙, PAH, 중금속… 디젤 엔진이 뿜는 독성 물질의 실체 (3) | 2025.08.19 |
마이크로바이옴 과대광고상: 과학자 조나선 아이선의 유쾌한 경고 (5) | 2025.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