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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의 정체를 밝힌 사람, 예르신

by 면역이야기 2025. 9. 3.

흑사병의 정체를 밝힌 사람, 예르신

1347년, 유럽을 강타한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병을 ‘흑사병(Black Death)’이라 불렀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손발이 까맣게 괴사하며 죽어갔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으며, 수많은 도시가 황폐화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재앙을 신의 분노, 별의 저주, 나쁜 공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병이 실제로는 미세한 생명체—눈에 보이지 않는 균—에 의해 전염된다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이 이야기는 너무 유명한데, 지금의 크림반도의 카파라는 도시에 몽고군이 처들어와서 물러날때 페스트 균에 감염된 시체를 던져서 페스트 균이 유럽에 퍼진 것으로 유명합니다. 

 

카파(오늘날 우크라이나 페오도시아)는 13세기 후반 제노바 공화국이 세운 흑해 최대의 무역 거점이었습니다. 1345 년, 교역 이권과 치안 문제를 둘러싼 충돌이 격화되자 골든호드의 잔니 벡 칸이 대규모 몽골군을 이끌고 이 도시에 대한 포위를 개시했습니다. 

몽골군은 육상에서 성을 두텁게 에워싸고 여러 차례 돌격했지만, 제노바 측은 해상 보급로를 이용해 장기간 버텼습니다. 1346 년 봄, 포위 진영 내부에서 급성 열병―오늘날 페스트로 확인된 전염병―이 퍼지며 다수의 병사가 숨졌습니다. 

당시 피아첸차 출신 공증인 가브리엘레 데 무시의 연대기에 따르면, 몽골군은 전염병으로 숨진 병사들의 시신을 투석기로 성 안에 투척하여 제노바인들에게도 질병을 옮기려 했다고 기술돼 있습니다. 이 기록은 인류 최초의 의도적 생물무기 사용으로 자주 인용되지만, 현대 연구자들 가운데는 실제 효과를 두고 회의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그들은 벼룩이 기생한 흑쥐가 성 안팎을 오가며 질병을 퍼뜨렸을 가능성을 더 높게 평가합니다. 

병력이 급감한 몽골군은 그해 말 포위를 풀고 철수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감염이 확산된 카파에서 제노바 상인들은 1347 년 봄 배 10여 척에 나눠 타고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메시나, 마르세유, 제노바 항으로 도피했습니다. 선창에 숨어 있던 흑쥐와 벼룩이 각 항구에 상륙하면서, 흑사병은 불과 수개월 만에 지중해 전역과 유럽 내륙으로 번져 나갔습니다. 

따라서 카파 포위전은 중앙아시아에서 발생한 페스트가 유럽으로 “점프”한 결정적 분기점이 되었으며, 동시에 생물전(生物戰) 논의의 출발점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흑사병의 전파 경로, 하지만 오류임

 위의 지도를 보면 카파에서 바그다드로 전파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일단 바그다드의 위치가 틀립니다. 바그다드는 내륙도시이지 항구도시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페스트는 2개의 경로로 퍼졌다고 생각하는데, 사라이를 거쳤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아니라고 보기도 하지만, 위의 지도를 조금만 변경하면 아래 경로로 퍼졌습니다.  사실 전파경로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잘못된 지도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페스트균의 전파 경로, 바그다드 위치 수정

 

이 페스트 균이 어떤 균인지 그 동안 몰랐다가, 약 550년이 지난 19세기에 이르러서야, 한 사람에 의해 밝혀지게 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알렉산드르 예르신(Alexandre Yersin)입니다.


예르신, 의사이자 탐험가

알렉산드르 예르신은 1863년 스위스에서 태어났으며, 후에 프랑스로 귀화했습니다. 의학과 생물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파리에서 루이 파스퇴르의 제자가 되었고,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세균학의 첨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의 스승들 중에는 에밀 루, 엘리 메치니코프 같은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이 있었으며, 이는 예르신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1894년, 예르신은 운명적인 임무를 맡게 됩니다. 홍콩에서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프랑스 정부와 파스퇴르 연구소는 즉시 예르신을 현장으로 파견합니다. 그는 당시 31세였습니다.


홍콩에서의 위대한 발견

예르신은 홍콩에 도착하자마자 엄청난 시신 더미와 대혼란 속에서 연구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가 도착했을 때, 이미 일본 팀이 흑사병을 연구하고 있었으며, 예르신은 병원에서 따돌림을 당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을 흔히 일본과 프랑스 혹은 예르신의 고향인 스위스 간의 갈등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것보다는 파스퇴르의 제자인 예르신과 로베르트 코흐의 제자인 키타사토 박사간의 경쟁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즉 프랑스와 독일간의 경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키타사토박사가 병원에서 거절당했기 때문에 예르신은 병원 근처 작은 오두막집을 마련해 실험실로 사용했습니다. 예르신은 시신을 묻는 인부들에게 돈을 주고 시신의 임파선 부위를 채취해 실험실로 가져왔습니다. 반면 키타사토는 흑사병의 원인을 혈액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임파선에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차이가 흑사병의 원인을 발견하는 갈림길이 됩니다.

그가 시료를 준비해 현미경으로 보자마자 원인균을 발견했습니다. 이때 그는 처음에는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발표하지 않았다가 페스트 균에 걸린 환자의 체내 림프절을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고 1894년 7월 30일 세균의 특징을 자세히 묘사해 프랑스 아카데미에 보냈습니다. 그가 발견한 균은 편모가 없는 그람 음성균이었습니다.

 

페스트균, 위키

 

 

예르신은 이 균을 ‘페스트균’으로 명명했으며, 이는 훗날 그의 이름을 따 Yersinia pestis로 공식화됩니다.

이 발견은 단순히 병원균을 찾았다는 차원을 넘어, 수백 년간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인류 최대의 재앙 중 하나의 원인을 규명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한편 경쟁자인 키타사토는 혈액에서 채취한 균을 영국의 란셋 이라는 의학전문지에 보냈습니다. 이때 그가 발견한 균은 편모가 있는 그람 양성균이라서 완전히 모양이 달랐습니다. 후에 그가 발견한 균은 페스트 균이 아니라 폐렴구균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은 예르신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정확하고 재현 가능한 결과를 낸 사람은 예르신이었으며, 과학사에서는 그를 페스트균의 ‘공식 발견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과 독일에서는 여전히 기타사토의 업적을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등, 이 문제는 과학과 외교가 얽힌 역사적 논쟁으로 남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기타사토는 코흐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발견 이후, 백신과 방역의 길

예르신의 발견은 단지 학문적 의미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후 인도와 중국 등지에서 페스트 방역 활동에 헌신했으며, 혈청요법 백신 개발에도 관여했습니다. 그가 설립한 베트남 나트랑(Nha Trang)의 파스퇴르 연구소는 동남아시아 전역의 감염병 연구 거점이 되었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페스트균이 벼룩—그리고 벼룩에 기생하는 설치류(특히 쥐)를 통해 전파된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질병의 생태학적 경로까지 밝혀내는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마무리하며: 이름 없는 죽음에 이름을 붙인 사람

Yersinia pestis.
이제 우리는 그 이름만 들어도 그 무게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무서운 병의 실체를 처음으로 밝히고, 질병에 이름을 붙여준 사람—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그 원인을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예르신의 업적은 단순한 과학적 발견이 아닙니다.
수많은 무명의 죽음에 이름을 붙이고, 질병을 공포가 아닌 분석과 대응의 대상으로 바꿔준, 그것은 인류가 과학으로 질병을 이해하려는 여정에서 이루어낸 가장 숭고한 발걸음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왜 독일에서는 기타사토의 업적까지는 중요하게 생각하는가라는 점도 생각해 봤습니다. 결국,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는 조국이 있다는 파스퇴르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