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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암 환자중 이름이 알려진 최초의 사람, 아토사

by 면역이야기 2025. 7. 11.

사실 아토사에 대한 기록은 매우 짧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야기가 매우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그 유명한 다리우스 1세의 왕비였기 때문입니다. 

아토사, 이란 국립 박물관, DanielTheGreat/Wikimedia

 

1. 아토사 왕비는 누구인가?

항목내용
이름 아토사(Atossa)
생몰 기원전 550년경 ~ 기원전 475년경
출신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
아버지 키루스 2세 (Cyrus the Great) – 페르시아 제국의 창건자
남편 캄비세스 2세(Cambyses II), 이후 다리우스 1세(Darius I)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 – 그리스 전쟁에 참전한 황제
 

아토사는 단순한 왕비가 아닌, 제국의 세대 교체 중심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일단 다리우스 왕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2. 다리우스 대제

다리우스 대제, 위키백과사전

 

요즘 사실 다리우스 왕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다리우스는 역사적으로 다리우스 1세와 3세가 유명한 편인데, 3세는 알렉산더에게 패배한 것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다리우스 1세도 사실 패배를 한 마라톤 전투로도 유명합니다만, 사실 그것으로 그를 평가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시각입니다. 그는 대단히 훌륭한 왕이었으며, 페르시아 제국의 초기를 탄탄하게 만들어 놓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의 일화가 많지만, 헤로도토스에는 다음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리우스는 그리스인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이 사랑하는 가족을 불에 태워 장례 치르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는가?”
그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다리우스는 칼라티아족(인도 지역 사람들)을 불러,
**“그대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은 뒤 불태워 장례 지내는 것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그들은 매우 화를 내며, “그건 신성모독이며 가장 잔인한 일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을 먹여(식인), 그 영혼을 영접한다”고 말했다.

그리스인들도 자신들이 그런 식인 장례를 한다면 말도 안 되는 짓이라며 기겁했다.

 

 

다리우스는 이 실험을 통해 두 민족 모두가 자기 문화는 ‘정상’이고, 타문화는 ‘미친 짓’으로 여긴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 제국의 황제로서, 문화 상대성과 통치자의 관용의 중요성을 스스로 깨달았거나, 혹은 신하들에게 강조하려 했던 것입니다. 

 

정말 아쉬운 것은 그의 아들이 영화 300에서 악역으로 나온 "나는 관대하다"의 크세르크세스라는 것이죠. 

 

어쨌거나, 그는 페르시아에서 왕의 길이라고 불리는 아래 지도의 빨간선을 닦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결코 마라톤 전투의 패배로만 기억될 사람은 아닙니다. 

전성기 페르시아 제국의 지도

 

그의 아버지는 그 유명한 키루스 대왕입니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을 시작한 왕이고, 역사적으로는 세계 최초로 제국을 건설한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인권의 상징 – “키루스 원통(Cyrus Cylinder)”

키루스는 기원전 539년 바빌론을 정복한 후,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선언문을 점토 원통에 아람어로 기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키루스 원통(Cyrus Cylinder)입니다.

 

참고로 아람어라는 언어를 여러분은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의 중동에서 오늘날 영어처럼 쓰인 언어이고 사실 예수님도 아람어로 말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아람어를 한 흔적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인데, 사실 예수님이 아람어로 주로 이야기 했지만, 나중에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고 봅니다. 

 

사실 성경은 그리스어만 남아있기 때문에 그 전에 아람어로 메모가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말이 많습니다. 발견되지 않았으니까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일부 사람들은 그래도 뭔가 메모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Q 문서라고 합니다. 뭐 사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고 결국 최종적으로 성경의 형태로 기록된 것은 그리스어입니다. 

 

중요한 것은 키루스 원통의 내용이 매우 흥미롭다는 것입니다. 

  • 나는 (신의 뜻으로) 이 땅의 백성들에게 자유를 선포한다.
  • 나는 바빌론의 신들을 원래의 성소로 돌려보내 주었다.
  • 나는 포로로 잡혀온 자들을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 나는 종교와 문화의 자유를 허락하였다.

유네스코는 이 문서를 “세계 최초의 인권 선언문”이라 부르고, 유대인들은 그를 하느님의 도구로까지 여깁니다. 

 

키루스와 다리우스는 노예제도를 싫어했다고 할 수 있는데, 페르시아에도 노예는 있었지만, 상당히 자비로운 편이었습니다. 

 

고대 페르시아와 다른 제국과의 노예제 비교
항목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출처 주로 전쟁 포로, 채무 불이행자 주로 전쟁 포로, 인종 기반 노예 무역
역할 국가 노동자, 일부는 급여 있음 농장, 광산, 가정, 성 노예 등 혹독한 강제노동
대우 일부는 재산 소유, 가족 구성 허용 재산 없음, 법적 인격 없음
해방 해방 가능성 비교적 높음 해방 드묾, 법적 절차 복잡
통합 정책 다양한 민족과 종교의 자치 인정 피지배민족은 노예화 대상
 

페르시아에서는 노예라는 개념보다는 ‘속박된 노동자’ 개념이 강했고, 실제 생활도 자유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경우도 많습니다.

 

아토사의 유방암

이제 다시 아토사 이야기를 하면 아토사는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유방암 환자입니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us)는 그녀의 유방암을 암시하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역사』 3권 133절).

아토사, 즉 키루스의 딸이며 다리우스의 아내인 그녀의 가슴에
하나의 멍울(종양)이 생겨났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그 종양은 터졌고,
그 이후로 상처가 점점 퍼져나갔습니다.

병이 처음 생겼을 때, 그녀는 그것이 아직 작다고 생각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부끄러워하며 그것을 숨겼습니다.

그러나 상태가 점점 더 심각해지자, 그녀는 그리스인 의사인 데모케데스를 불러
자신의 병을 보여주었습니다.

데모케데스는 그녀를 고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단 하나의 조건을 걸었습니다.

아토사는 그의 치료를 받은 뒤,
자신이 요청하는 어떤 것이든 들어주겠다고 맹세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다만 그는 덧붙여 말하길,
“나는 부끄러운 것을 요구하진 않을 것이며,
당신이 수치심을 느낄 만한 일은 결코 청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뒤에 아토사가 병에서 회복되었으며, 다리우스를 설득해서 그리스 원정을 조언했으며, 그 결과 마라톤 전쟁에서 패하게 됩니다. 

 

유방암을 치료하는 방법이 수술 밖에 없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수술을 통해서 유방암을 제거했을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그 뒤로 역사에서 자세히 나오지 않는데, 아마도 30년은 더 살지 않았나 추정합니다. 

 

출생 (키루스 2세의 딸로 추정) 기원전 550년경 0세
다리우스 1세와 결혼 기원전 522년 이후 약 28세
유방 종양 발생 및 치료 (데모케데스) 기원전 520년경 약 30세
아들 크세르크세스 즉위 (아토사가 적극 후원) 기원전 486년 약 64세
사망 시기 (추정) 기원전 475년 무렵? 약 75세?

 

암, 만병의 황제라는 책에서는 아토사가 수술 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고 했는데, 그녀가 아들의 즉위에 적극 관여한 것을 감안하면 그녀는 상당히 오랫동안 생존했습니다. 

 

그런데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아토사의 이야기는 유방암이 아닐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유방암이라는 이야기가 너무 매력적이라서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