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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볼라 바이러스의 역사와 백신 및 치료제 개발의 장엄한 과정

by 면역이야기 2025. 7. 25.

에볼라 바이러스는 인류에게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1970년대 중반 아프리카 오지의 작은 마을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후, 수차례의 유행을 통해 무서운 치사율과 공포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국제사회와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며 희망의 씨앗도 함께 뿌려졌습니다. 지금부터 에볼라 바이러스의 발견에서부터 최근 백신·치료제 개발까지의 과정을, 역사적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1. 1976년 에볼라 바이러스의 최초 발견 (수단과 자이르)

1976년의 어느 날, 중앙아프리카의 외딴 마을. 수단 남부의 작은 공장 마을과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 북부의 얌부쿠(Yambuku)라는 마을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출혈성 열병이 동시에 발생했습니다. 자이르 얌부쿠에서는 한 가톨릭 선교 병원의 교장 선생님이 열대 우림에서 사냥한 야생 고기를 먹은 뒤 고열과 오한을 보여 병원을 찾았습니다. 말라리아로 생각한 의료진은 그에게 말라리아 치료제 주사를 놓았지만, 며칠 후 그는 두통과 근육통, 소화관 출혈 증세까지 나타나 일주일 만에 숨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치료를 받았던 얌부쿠 선교병원에서는 주사기 소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이로 인해 병원에서 주사를 맞은 많은 환자들에게 같은 병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서 주사를 맞은 환자들과 그 가족들을 중심으로 원인 모를 출혈열 증상이 잇따랐고, 환자들은 일주일 남짓한 짧은 기간 내에 속속 목숨을 잃어 갔습니다. 새로운 전염병의 등장이었습니다.

거의 같은 시기, 수단(현재의 남수단)의 안자라(Nzara) 지역에서도 비슷한 전염병이 발생했습니다. 한 면직물 공장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급속히 퍼져 공장 노동자의 37%가 감염되었고, 이들이 지역 병원으로 옮겨지면서 병원 내 감염이 이어졌습니다. 공장 지붕에는 수많은 박쥐들이 매달려 있었다고 전해지며, 바이러스의 근원이 박쥐 등 야생동물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수단과 자이르에서 거의 동시에 발생한 이 두 질병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환자들이 겪는 증상은 매우 흡사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현지 보건 당국은 즉각 국제조사팀을 꾸려 원인 불명의 이 열병 조사에 나섰습니다. 자이르의 발병 지역은 정부에 의해 봉쇄되고 격리되었으며, WHO가 파견한 국제위원회에는 벨기에와 미국 등의 바이러스 전문가들이 참여했습니다. 벨기에 왕립열대의학연구소의 피터 피옷(Peter Piot) 박사와 콩고 출신의 신진 미생물학자 장자크 무옘베(Jean-Jacques Muyembe) 등은 환자의 혈액 샘플을 채취해 유럽과 미국 연구소로 보냈습니다. 미국 CDC(질병통제예방센터)와 벨기에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전자현미경으로 이 샘플들을 분석한 끝에 기존에 알려진 바이러스와 다른 새로운 바이러스를 발견했습니다. 이 바이러스는 1967년에 발견된 마버그 바이러스와 모양이 비슷한 길쭉한 필라멘트(실) 형태였지만 면역학적으로 구별되는 완전히 새로운 종이었습니다. 국제조사팀은 이 치명적인 신종 바이러스에 얌부쿠 마을 근처를 흐르던 강의 이름을 따서 "에볼라(Ebola) 바이러스"라고 명명했습니다. 이는 특정 지역이나 집단에 오명을 남기지 않으면서도 발생지를 기억하기 위한 이름이었습니다.

 

에볼라 바이러스, CDC

2. 초기 피해와 지역사회의 반응 (감염 양상, 치사율, 의료진 피해 등)

처음 등장한 에볼라 바이러스의 파괴력은 참혹했습니다. 자이르 얌부쿠에서 시작된 첫 번째 유행에서는 단 두 달 남짓한 기간(1976년 9~10월)에 318명이 감염되어 이 중 28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치명률이 약 88%에 달한 것입니다. 수단에서도 같은 해 284명이 감염되어 151명이 사망했는데, 치명률은 약 53%로 다소 낮았지만 절반 이상의 환자가 숨지는 치명적인 질병임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초기에는 고열과 두통, 심한 피로가 나타나고 곧이어 구토, 설사, 내부 출혈 등으로 상태가 악화되었습니다. 많은 환자들이 병을 얻은 후 일주일 내에 속수무책으로 사망하였고, 감염자와 접촉한 가족들까지 연쇄적으로 쓰러져 갔습니다. 지역사회는 경험해보지 못한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정체 모를 이 질병을 두려워하여 병원을 기피하거나 환자를 가까이하지 못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전염의 고리가 됐던 병원을 폐쇄하는 조치가 이루어졌습니다. 실제로 얌부쿠의 선교병원은 발병 4주 만에 문을 닫았는데, 그때까지 이 병원의 의료진 17명 중 11명이 이 병으로 숨진 뒤였습니다. 환자를 돌보다 목숨을 잃은 수녀와 간호사, 의사들의 희생은 지역사회에 큰 슬픔과 충격을 주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치료제도 백신도 없었기에, 유일한 대응은 전염 고리 끊기였습니다. 의료진과 국제조사팀은 환자들을 격리하고, 접촉자들을 추적하여 지역 간 이동을 통제하는 한편 보호장비를 갖추고 돌보는 등의 기본적인 방역 조치를 실시했습니다. 자이르 정부는 발병 지역을 군으로 봉쇄하여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고, 마을 주민들은 집집마다 환자가 발생하지 않는지 감시하는데 협조했습니다. 한편, 마을에서는 이 미지의 질병을 ‘나쁜 영혼’이나 저주로 여기는 소문도 돌았고, 환자의 시신을 전통 방식으로 장례 치르려다 가족들이 함께 감염되는 비극도 일어났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국제 조사팀과 현지 보건 요원들의 노력으로 다행히 발병 몇 달 만에 전염의 고리가 차단되었고, 1976년 첫 유행은 마무리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한 마을 공동체가 입은 트라우마와 의료진의 희생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습니다.

3. 국제

사회와 과학계의 초기 대응

 

에볼라의 출현 소식은 전 세계 과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 인류는 천연두를 근절하고 소아마비나 홍역을 통제해 나가며 전염병 정복에 자신감을 얻고 있었지만, 에볼라 바이러스는 이러한 믿음에 경종을 울렸습니다. WHO가 주도한 국제 조사팀의 신속한 대응 덕분에 첫 유행은 비교적 빨리 진정되었지만, 새로운 치명적 바이러스의 존재는 많은 의문을 낳았습니다. 바이러스의 자연 숙주는 대체 무엇인지, 어떻게 인간에게 전파되었는지, 그리고 치사율이 그렇게 높다면 왜 이제야 나타났는지 등이 수수께끼로 남았습니다.

 

세계각지의 연구소에서는 에볼라 바이러스를 분리하고 특성을 밝히기 위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 바이러스가 마버그 바이러스와 함께 필로바이러스과(Filoviridae)에 속한다는 것을 밝혔고, 감염 원인에 동물 숙주가 있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초기 역학 조사에서는 환자들이 과일박쥐나 원숭이 등의 야생동물과 접촉한 이후 발병했다는 공통점이 관찰되었습니다. 이는 에볼라가 인수공통감염병(zoonosis), 즉 동물로부터 인간에게 전파된 질병임을 시사했습니다. 특히 얌부쿠 환자들의 사례에서, 어떤 이들은 숲에서 사냥한 야생 고기(부시미트)를 먹은 뒤 병에 걸렸고, 수단 공장에서는 천장에 매달려 살던 박쥐들이 의심스러운 존재로 지목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과학자들은 과일박쥐류가 에볼라 바이러스를 품고 다니는 자연 숙주일 가능성이 크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국제 보건 기구들은 새로운 출혈열에 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WHO와 CDC는 기존의 황열, 라사열 등 출혈열 대응 경험을 바탕으로 에볼라 대응 지침을 만들었고, 감염 사례가 발생하면 신속히 격리하고 방호복을 갖춘 의료진이 치료에 임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첫 유행 이후 1977년 자이르와 1979년 수단 등지에서 산발적인 소규모 유행이 몇 차례 있었지만, 다행히도 모두 수십 명 감염 수준에서 빨리 진압되었습니다. 이 시기 에볼라 연구는 극소수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졌고, 일반 대중에게 에볼라는 거의 잊힌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에볼라는 다시 한번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4. 주요 유행 사례: 1995년 키크윗, 2000년 우간다 등

 

1995년,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 키크윗(Kikwit)이라는 도시 인근의 숲 속 마을에서 한 숯 굽는 남자가 고열과 출혈 증세로 사망했습니다. 곧이어 그의 가족과 장례식에 참석했던 이웃들이 같은 증상으로 쓰러졌고, 그 여파는 근처 40만 명 인구의 키크윗 시까지 번졌습니다. 지역 병원으로 환자들이 몰리면서 병실과 의료진은 속수무책으로 감염되어 갔고, 패닉에 빠진 시민들은 병원을 외면한 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1976년 이후 오랜만에 다시 대두된 이 출혈열 사태에 WHO와 국경없는의사회(MSF), CDC 등이 긴급 투입되어 대응에 나섰습니다. 방역 팀은 환자 격리와 마을 봉쇄, 접촉자 추적을 실시하는 한편, 의료진들에게 마스크와 장갑, 방호복을 철저히 착용하게 하고 병원 위생을 강화했습니다. 주민들에게는 전통 장례 의식을 지양하고 안전한 매장법을 따르도록 설득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들로 몇 달 후 유행은 가까스로 통제되었지만, 그 대가로 315명의 감염자 중 250명 사망(치명률 약 80%)이라는 비극적 피해를 남겼습니다. 특히 의료진과 간병하던 가족들의 희생이 컸는데, 키크윗의 한 내과 의사는 환자를 돌보다 아내, 아이와 함께 목숨을 잃었고 많은 간호사와 보건 인력이 순직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헌신 덕분에 키크윗 사태는 세계적으로 에볼라의 위험성을 다시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키크윗 유행에서 주목할 만한 시도가 하나 있었습니다. 장자크 무옘베 박사를 비롯한 콩고 의료진은 치료제가 없던 상황에서 에볼라 생존자의 혈액을 환자들에게 수혈하는 실험적 치료를 시도했습니다. 생존자 혈액 속 항체가 환자를 살릴지도 모른다는 희망에서였습니다. 무옘베 박사는 회복기 환자 1명의 혈액을 정제하여 위독한 환자 8명에게 주입했는데, 놀랍게도 그중 7명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비록 체계적인 임상시험 결과는 아니었지만, “생존자의 혈액이 치료 단서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로 남았습니다. 훗날 이 시도는 에볼라 항체치료제 개발의 중요한 영감이 되었습니다.

 

2000년에는 우간다 북부에서 대규모 에볼라 유행이 발생했습니다. 우간다 굴루(Gulu) 지역에서 시작된 이 유행은 비교적 인구가 많은 지방 도시와 인근 지역사회까지 번져나가면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때 확인된 환자는 425명, 그중 사망자가 224명으로 치명률이 약 53%에 이르렀습니다. 이 유행을 일으킨 것은 에볼라바이러스의 한 종인 수단형(Sudan ebolavirus)이었는데, 증상으로는 고열이 가장 흔하게 보고되었습니다. 우간다 정부와 WHO, MSF 등은 신속 대응팀을 조직하여 발병 지역을 통제하고 주민들에게 위기 상황을 알렸습니다. 특히 지역사회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마을 단위의 방역 봉사팀이 조직되었고, 주민들은 서로를 감시하고 돕는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전통 장례 관행 대신 안전한 장례법을 적용하도록 설득하는 한편, 라디오 방송과 마을 회의를 통해 질병 예방법을 알리는 대대적인 보건 교육도 이뤄졌습니다. 이러한 공동체와 정부의 노력 덕분에 우간다의 유행은 수개월 만에 진정되었고, 국경 너머로 번지지 않으며 막을 내렸습니다. 이 경험은 “지역사회의 참여 없이는 에볼라를 이길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습니다.

 

이후로도 에볼라 바이러스는 간헐적으로 아프리카 중부와 동부에서 작은 규모로 발생했습니다. 2000년대 중반까지 확인된 주요 종은 앞서 언급한 자이르형(Ebola virus, 치명률 평균 60~90%)수단형(Sudan virus, 치명률 약 50%), 그리고 2007년 우간다 번디부기오(Bundibugyo) 지역 유행 때 처음 발견된 번디부기오형(Bundibugyo virus, 치명률 약 30%) 등이 있습니다. 다행히 이러한 유행들은 신속한 대응으로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 선에서 통제되어 큰 재앙으로 번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2014년 서아프리카에서 발발한 사상 최악의 에볼라 대유행은, 전 세계에 에볼라의 위협을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5. 2014–2016 서아프리카 대유행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기니)

2013년 12월, 서아프리카 기니의 밀림 지대에 위치한 작은 마을 멜리아נד우(Meliandou). 그곳에서 두 살배기 남자아이가 고열과 설사 증세를 보이다 숨지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이 어린아이는 서아프리카 에볼라 대유행의 ‘환자 0번’으로 여겨집니다. 아이는 숲 속 나무에서 서식하는 과일박쥐와 접촉하여 에볼라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가족과 마을 주민들로 차츰 전염이 번져나갔습니다. 몇 달간 원인 미상의 열병이 산발적으로 퍼지던 상황에서, 2014년 3월이 되어서야 기니 보건당국과 MSF는 이 질병이 에볼라 바이러스에 의한 것임을 확인하고 경보를 발령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바이러스는 국경을 넘어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으로 숨어 들어간 뒤였습니다.

 

에볼라 사태는 초유의 속도로 서아프리카 전역을 뒤덮기 시작했습니다. 이전까지 에볼라 유행은 대부분 외딴 시골이나 밀림 지역에 국한되었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감염 초기 환자들이 적절한 격리 조치를 받지 못한 채 대도시로 이동하면서, 전염병이 인구 밀집 지역으로 확산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보건 체계가 취약한 국가들에서는 환자를 격리할 시설과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고, 많은 병원들이 제대로 된 보호장비도 없이 환자를 받다가 오히려 확산 거점이 되고 말았습니다. 각국 정부의 대응 역량을 훨씬 뛰어넘은 사태에 국제사회는 크게 당황했고, 초기 대응은 한발 늦고 혼란스러웠습니다. 2014년 6월, 현장에서 활동하던 MSF는 “에볼라 사태가 통제 불능 상태”라고 국제사회에 경고했지만, 그즈음에는 이미 바이러스가 국경을 넘어 여러 나라로 퍼진 뒤였습니다. 라이베리아의 수도 몬로비아, 시에라리온의 프리타운 등 도시 빈민가에서 환자가 속출했고, 격리나 장례 조치에 반발한 주민들과 방역 요원 사이의 긴장도 높아졌습니다.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에볼라 치료센터가 공격받고 환자가 탈출하는 사건까지 벌어지며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달았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WHO는 2014년 8월, 에볼라 사태를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PHEIC)로 공식 선언했습니다. 이는 전 세계적인 대응과 지원을 촉구하는 조치로, 이후 미국 CDC, 유엔 에볼라 대응 임무부대(UNMEER) 등 각종 국제기구와 구호 단체들이 총동원되었습니다. 미국, 유럽, 아시아 각국에서도 의료진과 군 인력을 파견하고 이동식 병원과 검사실을 세웠습니다. 국경 없는 의사회(MSF)와 적십자사 등은 현장에서 환자 치료와 방역을 주도했고, 지역 자원봉사자들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접촉자 추적보건 교육에 힘썼습니다. 특히 전통 장례식이 감염 확산의 주요 원인임이 밝혀지면서, 각 지역사회 지도자들은 안전한 장례 지침을 홍보하고 ‘안전하고 존엄한 장례’를 문화적으로 수용하는 데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의 기세는 쉽사리 꺾이지 않았습니다. 서아프리카 3개국 전체가 마비 상태에 빠졌고, 2014년 말까지 수만 명의 확진자가 발생했습니다. 일부 감염자는 비행기 등을 통해 유럽과 미국에까지 들어와, 나이지리아, 말리, 스페인, 영국, 미국 등지에서도 소규모 전파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전 세계는 에볼라 확산을 우려하며 국경 검역을 강화했고, 언론에서는 연일 에볼라 관련 속보가 이어졌습니다. 바이러스가 더 이상 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국제사회의 최우선 과제가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2015년에 접어들면서 점차 국제적인 지원과 지역사회의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환자들은 격리치료센터에서 수액 공급 등 집중치료를 받으며 생존율을 높일 수 있었고, 방역요원들은 한층 더 적극적으로 의심 환자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사태 발생 1년이 지난 2015년 중반부터 기니,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세 나라의 신규 환자 수는 뚜렷하게 감소했습니다. 그리고 2016년 3월, WHO는 마침내 서아프리카 에볼라 유행에 대한 국제적 비상사태를 해제했습니다. 이 대유행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공식 집계만 확진 환자 15,261명, 사망자 11,325명에 달했습니다. 추후 추정치까지 포함하면 감염자 2만 8천여 명, 사망자 1만 1천여 명으로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에볼라 유행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었고, 부모를 잃은 고아와 생계를 잃은 생존자들이 남았습니다. 서아프리카 3국의 경제는 황폐화되었으며, 사회적 불신과 트라우마도 깊게 남았습니다.

왜 서아프리카에서 그렇게 크게 번졌을까?

서아프리카 대유행을 돌아보며, 전문가들은 왜 이 지역에서 에볼라가 그렇게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는지를 분석했습니다. WHO는 2015년 일련의 평가를 통해 다음과 같은 요인들을 지목했습니다:

  • 준비 부족: 서아프리카 국가들은 2014년 이전까지 에볼라 발생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방역 준비태세가 갖춰져 있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례적으로 대도시에서 에볼라가 발생하자, 인구밀집 지역에서의 확산을 막을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는 점이 드러났습니다. 감염자들을 격리하고 집중치료를 제공할 만한 시설과 인력이 미비한 상태였습니다.
  • 손상된 공중보건 체계: 유행이 발생한 기니,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은 과거 내전과 분쟁의 영향으로 보건 인프라가 매우 취약했습니다. 도로, 교통, 통신 체계가 부족하여 환자를 신속히 이송하거나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웠고, 지방의 작은 보건소들은 큰 병원을 연결하는 체계도 없었습니다. 이는 초기 대응의 지연과 환자 치료 기회의 상실로 이어졌습니다.
  • 인구의 높은 이동성: 서아프리카 지역 주민들은 가족과 생계를 위해 국경을 넘나드는 이동이 잦았습니다. 친척을 방문하거나 일자리를 찾아 인근국으로 이동하는 일이 일상적이어서, 한 나라에서 발병한 질병이 금세 이웃 나라 도시에 번지기 쉬운 환경이었습니다. 특히 이번 사태에서는 감염이 국경검역이 거의 없는 육로 경로로 확산되며 통제가 어려웠습니다.
  • 의료인력 부족: 유행 전 서아프리카의 의사 수는 인구 10만 명당 한두 명에 불과할 정도로 극심한 의료인력 부족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유행 중에 500명 이상의 의사와 간호사가 에볼라로 사망하거나 업무를 떠나면서, 보건의료 시스템은 사실상 붕괴되었습니다. 남은 의료인력은 과중한 부담을 떠안았고 적절한 치료를 제공하기 더 어려워졌습니다.
  • 문화적 관습: 많은 감염 사례들이 전통적인 장례 문화와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서아프리카에서는 가족과 이웃이 시신을 씻기고 만지는 장례 관행이 있는데, 에볼라로 숨진 환자의 시신에도 바이러스가 남아있어 이러한 접촉이 치명적인 전파원이 되었습니다. 또한 가족애와 공동체 의식이 강한 문화 특성상, 보호장비 없이도 아픈 친척을 돌보거나 아이를 안아주는 측은지심이 발휘되었는데, 이러한 사랑의 행동들이 오히려 바이러스에 노출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환자 곁을 지키려는 연민과 헌신이 에볼라 앞에서는 큰 위험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처럼 취약한 보건 체계, 이동성과 문화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서아프리카 에볼라 유행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비극은 전 세계가 보건 인프라 투자와 대비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 전문가의 말처럼, “서아프리카에 더 일찍 공중보건 체계에 대한 투자가 이뤄졌더라면 2014년 에볼라 확산을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나라든 발병 현지에서 전염병을 잡지 않으면 안전할 수 없습니다”. 결국 “어디에선가 안전하지 않으면,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다”는 교훈을 남긴 사건이 되었습니다.

6. WHO, CDC, MSF 등의 개입과 대응의 진화

에볼라 대응에서 국제기구와 인도주의 단체들의 역할은 시대에 따라 크게 변화하고 발전해 왔습니다. 초창기인 1976년 첫 유행 때 WHO 주도로 국제 조사단이 파견된 것이나, 1995년 키크윗 유행 때 MSF와 CDC가 합류해 대응한 것은 국제 협력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어디까지나 소수 전문가들의 임무 수행에 가까웠습니다. 에볼라가 주로 외딴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관심과 지원도 제한적이었습니다. 각 유행은 WHO와 현지 보건부가 역학 조사와 격리를 주로 담당하고, MSF 같은 단체들이 현장에서 환자 치료와 위생 관리를 돕는 방식이었습니다. CDC와 같은 기관은 주로 전문가와 장비를 보내 진단과 감시를 지원했습니다.\

 

2014년 서아프리카 대유행은 이러한 국제 대응 체계에 극적인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사태 초기 WHO는 대응이 늦었다는 비판을 받았고, MSF 등 현장 단체들은 수용능력 이상의 환자들로 압박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계기로 WHO는 2016년 내부에 보건비상 프로그램(Health Emergencies Programme)을 신설하며 긴급 대응 기능을 대폭 강화했습니다. 이는 WHO가 전통적인 기술 자문 역할을 넘어, 신속히 현장 대응팀을 꾸리고 조정하는 기구로 거듭난 중요한 변화였습니다. 이제 WHO 본부와 아프리카 지역사무소에는 상시적인 응급대응 인력이 배치되어, 발병 보고가 들어오면 몇 시간 내로 팀을 파견하고 물자를 지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2015년 WHO는 국제적 공중보건 위기 상황에 즉각 자금을 투입하기 위해 비상기금(Contingency Fund for Emergencies)을 조성했습니다. 이는 “질병은 돈이 모일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교훈에 따른 것으로, 신속 대응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CDC 역시 서아프리카 사태 이후 자국 내에 에볼라 대응팀을 꾸리고, 가나 등 아프리카 거점에 장비와 인력을 사전 배치하는 등 발 빠른 지원 체계를 마련했습니다. CDC는 전 세계 감염병 위협에 대비한 글로벌 보건안보 구상(GHS)을 강화하여, 취약 국가들이 진단 검사와 역학 조사 역량을 키우도록 훈련을 지원했습니다. 실제로 최근 몇 차례의 에볼라 유행에서 CDC는 전문가들을 현장에 파견해 환자 진단검사법을 전수하고 감염 통제를 지도하며 국제 공조에 힘썼습니다. 예를 들어 2022년 우간다 수단형 에볼라 유행 때, CDC 팀은 현지 실험실의 바이러스 진단과 감시 시스템 구축을 지원하여 유행 종식을 도왔습니다.

국경없는의사회(MSF)적십자사 같은 인도주의 단체들도 에볼라 대응의 최전선에서 중요한 교훈을 축적했습니다. MSF는 1995년 키크윗에서 에볼라 격리치료소를 처음 운영한 이후, 매번 새로운 유행 때마다 치료소 디자인과 감염통제 기준을 개선해 왔습니다. 2014년 서아프리카에서는 환자를 보다 잘 돌보고 지역 주민의 불신을 줄이기 위해, 보호복을 입은 채로도 환자의 가족들이 투명한 막越越(너머)으로 환자를 볼 수 있는 치료 공간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2018년 콩고 동부 유행에서는 ALIMA(국제의료행동단)와 같은 MSF의 파트너 단체가 “큐브(CUBE)” 격리실이라 불리는 투명한 벽의 생체안전 격리 병동을 도입했습니다. 이를 통해 의료진은 중환자 치료를 더 안전하고 세밀하게 할 수 있었고, 가족들은 보호장비 없이도 격리된 환자를 눈으로 확인하며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혁신은 에볼라 치료에 따르는 공포와 소문을 상당 부분 해소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또한 지역사회와의 협력이 대응의 핵심 원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과거 에볼라 대응은 과학자와 의료진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인류학자와 지역사회 지도자, 심리사회 지원 인력까지 함께 팀을 이루어 주민들과 소통합니다. 2018~2020년 콩고 민주공화국 동부 에볼라 유행에서는 발병 초기부터 사회문화 전문가들이 지역 주민들의 생각과 불안, 소문을 적극 수집하여 매주 현장 대응팀에 조언을 했습니다. 그 결과, 마을마다 가장 신뢰받는 지역 인사를 방역대사로 세워 주민 설명회를 열고, 지역어로 된 전단과 라디오 방송을 활용하는 등 문화에 맞춘 소통 전략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공동체가 원하는 바를 경청하여 현지인으로 구성된 방역팀을 꾸리고, 마을 청년들을 소독 요원이나 장례 지원 인력으로 고용함으로써 주민들의 협력을 끌어냈습니다. 이러한 “현지 주도의 대응”은 시간이 갈수록 에볼라 대응의 표준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에볼라와의 싸움에서 국제사회는 학습하고 진화해 왔습니다. 1970년대에 비하면, 이제는 발병 신고에서부터 진단, 격리, 치료제 투입, 예방접종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대응 체계가 확립되었고, 서로 다른 기관들이 하나의 목표 아래 협력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WHO 사무총장은 서아프리카 사태 이후 “우리는 뼈아픈 실패를 겪었지만, 함께 교훈을 얻었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2019년 콩고 에볼라 유행 때 WHO는 전 세계 전문가들을 모아 신속대응을 펼치며 전과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WHO 긴급대응 책임자인 마이크 라이언 박사는 백신을 맞는 현장을 지켜본 후 “내 생애 처음으로 에볼라 현장에서 공포가 아닌 희망을 사람들의 얼굴에서 보았다”라고 말했습니다. 국제사회의 연대와 과학의 진보가 만들어낸 새로운 국면이었습니다.

7. rVSV-ZEBOV 백신 개발과 임상시험

에볼라 바이러스가 발견된 지 거의 40년이 지나도록 효과적인 백신은 없었습니다. 치명률은 높지만 발병 지역이 제한적이고 발병 빈도도 드물었기 때문에, 제약사들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백신을 개발하기를 주저했던 것이 하나의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2014년 서아프리카 대유행은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을 겪으며, 국제사회는 더 이상 백신 개발을 늦출 수 없다는 공감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미국, 유럽, 중국 등 여러 연구소와 제약기업들이 에볼라 백신 후보를 개발하는 데 뛰어들었고, 세계은행과 각국 정부도 대규모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그중 가장 앞서나간 후보가 바로 rVSV-ZEBOV 백신, 통상 ERVEBO®(에르보)로 불리는 백신입니다. 이 백신은 캐나다 공중보건국 연구진이 개발한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미국 머크(Merck)사가 임상 개발을 이끌었습니다. rVSV-ZEBOV 백신은 살아있는 약독화된 수포성구내염 바이러스(VSV)에 에볼라 바이러스의 면역유발 유전자를 넣어 만든 재조합 백신입니다. 쉽게 말해, 인체에 해가 없는 바이러스를 운반체로 이용하여 에볼라 바이러스의 일부 단백질(바이러스 외피의 당단백질)을 우리 몸에 보여줌으로써, 마치 실제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처럼 면역반응을 일으키도록 한 것입니다. 이 백신 자체에는 에볼라 바이러스 전체가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백신을 맞는다고 해서 에볼라에 걸릴 위험은 전혀 없습니다.

 

서아프리카 유행 막바지였던 2015년, 기니에서 역사적인 에볼라 백신 임상시험이 시행되었습니다. WHO와 여러 연구기관이 협력하여 '링 백신 접종(ring vaccination)' 전략을 활용한 대규모 시험을 진행한 것입니다. 링 백신 접종이란, 에볼라 확진 환자가 발생하면 그 환자의 접촉자와 접촉자의 가족 등 '환자를 둘러싼 고리'에 속한 사람들을 바로 백신 접종하여 감염의 확산을 차단하는 방법입니다. 이 시험에서 3,775명의 고위험 접촉자가 즉각 백신을 맞았고, 이후 10일이 지나 백신 효과가 나타난 시점부터 이들 중 한 명도 에볼라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백신의 예방 효과가 매우 높다는 놀라운 결과였고, 2015년 말 해당 연구 결과가 학술지에 발표되자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드디어 에볼라를 예방할 수 있는 백신이 실현된 것입니다.

 

이후 rVSV-ZEBOV 백신은 2018년 콩고 에볼라 유행에서 현장에 투입되어 그 실효성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2018년 콩고 민주공화국 에콰테르 주에서 에볼라 발병이 선언되자, WHO와 현지 보건당국은 발병 일주일 만에 백신을 긴급 승인하여 투입했습니다. 곧이어 동부 키부(Kivu) 지역에 대규모 유행이 발생했을 때도, 초기부터 수만 도스의 백신이 반입되어 접촉자와 의료진을 대상으로 접종이 이뤄졌습니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콩고 동부 유행에서 30만 명 이상의 사람이 예방 접종을 받았고, 이는 유행 억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다만 당시 백신은 정식 승인을 받은 제품이 아니었기에, “동정적 사용(자비 사용) 프로그램” 형식으로 접종이 이뤄졌습니다. 백신을 맞는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고 동의를 구한 후, 이상반응 모니터링을 철저히 실시하였습니다.

 

결국 에볼라 백신은 2019년 말 유럽과 미국의 의약품 규제 당국으로부터 정식 사용 허가(승인)를 받았습니다. WHO도 이 백신을 신속히 사전적격심사(Prequalification)하여 국제 기구가 백신을 구매·배포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를 통해 2020년 초에는 콩고, 부룬디, 가나 등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규제 기관도 이 백신을 자국에 허가하였고, 에볼라 풍토병 지역에 백신 비축분을 확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에볼라 바이러스(자이르 종)에 대해서는 예방 접종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생긴 셈입니다. 물론 이 백신이 모든 종류의 에볼라 바이러스에 다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허가된 백신은 자이르형 바이러스에 대해서만 효능을 지니며, 2022년 우간다에서 유행했던 수단형 바이러스 등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별도의 백신이 개발 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볼라 대응 역사에서 백신의 등장은 게임 체인저로 불립니다. 예방접종을 통해 의료진과 접촉자들의 발병을 막을 수 있게 되면서, 에볼라에 대한 공포는 한결 줄고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한 현장 의료진의 말처럼, “백신 접종 덕분에 에볼라 현장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의 얼굴에 공포 대신 안도와 희망의 표정이 떠올랐다”는 것입니다.

8. 항체 치료제 Inmazeb, Ebanga 개발과 승인

백신이 예방의 돌파구를 연 반면, 이미 감염된 환자를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는 여전히 어려운 숙제로 남아 있었습니다. 에볼라 유행 초기에는 특별한 치료법이 없어, 환자들에게 수액을 주고 전해질을 맞춰주는 등 대증요법(지지치료)만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다 1995년 키크윗 유행 때 무옘베 박사가 시도했던 생존자 혈액 치료법은 항체 치료 가능성에 대한 영감을 주었습니다. 이후 과학자들은 생존자의 혈액에서 강력한 “모노클로널 항체(monoclonal antibody)”를 골라내는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모노클로널 항체란 특정 항원을 표적으로 삼아 결합하는 단일클론 항체로,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만들어낸 항체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을 선택해 대량으로 생산한 인공 항체입니다. 에볼라 바이러스의 당단백질(glycoprotein)에 달라붙어 바이러스가 인체 세포에 침투하지 못하도록 막는 항체가 있다면, 이 항체를 약으로 만들어 환자에게 투여함으로써 바이러스를 중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00년대 후반부터 미국과 캐나다 연구진은 ZMapp이라는 최초의 실험적 항체치료제를 개발했습니다. 이것은 쥐에게 에볼라 항원을 주입하여 만든 3종류의 항체를 혼합한 약제로, 2014년 서아프리카 유행 때 에볼라에 감염된 미국인 의료봉사자(켄트 브랜틀리 박사 등)에게 긴급 투여되어 주목을 받았습니다. ZMapp을 맞은 환자 일부가 극적으로 회복하면서 한때 “에볼라 특효약”으로 화제가 되었지만, 정식 임상시험에서 환자들의 생존율을 유의하게 높이지 못해 결국 승인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한편,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백신연구센터는 다른 접근을 택했습니다. 키크윗 생존자 중 한 남성의 혈액에서 강력한 항에볼라 항체를 찾아낸 것입니다. 이 항체는 mAb114라고 명명되었고, 이후 민간 제약사(리지백 바이오)와 협력하여 임상 개발이 이루어졌습니다. 무옘베 박사가 1995년에 수혈로 살려냈던 환자의 혈액이 20년 후 현대과학의 손에서 정제된 치료제로 거듭나기 시작한 셈입니다. 이 항체치료제는 개발 코드명으로 mAb114 또는 REGN-EB3 등으로 불렸는데, 훗날 각각 Ebanga(에반가)Inmazeb(인마제브)라는 상표명으로 출시됩니다.

 

2018년 콩고 동부 에볼라 유행 때는 역사상 최초로 치료제 임상시험(PALM Trial)이 발동되었습니다. WHO와 DRC(콩고민주공화국) 보건부, NIH, MSF 등 국제 컨소시엄이 협력하여, 유행 지역에서 4종의 유망한 치료제를 환자들에게 무작위로 배정 투여하는 임상시험을 수행한 것입니다. 이 시험에는 600명이 넘는 환자가 참여했고, 시험 도중이라도 효과가 좋아 보이는 약은 모든 환자에게 열려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2019년 8월, 중간 분석 결과 희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시험에 포함된 치료제 중 항체치료제 두 가지(mAb114과 Regeneron 3항체 칵테일)가 다른 치료제들보다 현저히 사망률을 낮춘 것입니다. 특히 초기 바이러스 혈증이 낮은 환자들이 이 약들을 맞으면 90%까지 생존할 수 있다는 고무적인 데이터가 나왔습니다. 윤리위원회는 즉시 시험을 조기 종료하고 두 항체치료제를 모든 환자에게 사용하도록 결정했습니다. 이로써 에볼라 치료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마련되었습니다.

 

Regeneron사의 3중 항체 칵테일(REGN-EB3)은 이후 정식 제품명 Inmazeb(인마제브)으로, NIH/리지백의 mAb114는 Ebanga(에반가)라는 이름으로 각각 미 식품의약국(FDA)에 승인 신청이 이루어졌습니다. 2020년 10월, Inmazeb가 FDA 승인을 받음으로써 사상 최초의 에볼라 치료제가 탄생했습니다. 뒤이어 같은 해 12월 Ebanga도 FDA 승인을 획득하여, 에볼라 치료에 공식적으로 쓸 수 있는 두 가지 약물이 갖추어졌습니다. Inmazeb는 atoltivimab, maftivimab, odesivimab-ebgn이라는 세 종류의 단일클론 항체로 구성된 칵테일입니다. 이 항체들은 모두 에볼라 바이러스 표면의 당단백질에 결합하여 바이러스가 인체 세포에 부착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감염을 차단합니다. 임상시험에서 Inmazeb로 치료받은 환자들의 4주 치명률은 약 33.5%로, 치료를 받지 못하거나 기존 실험약(ZMapp)을 받은 환자들의 치명률(50% 이상)에 비해 크게 낮았습니다. Ebanga는 단일클론 항체 ansuvimab(mAb114)을 주성분으로 하는 약제로, 동일한 표적(에볼라 바이러스 당단백질)을 공격합니다. 임상시험 결과 4주 치명률이 35% 내외로 Inmazeb와 비슷한 효과를 보였으며, 두 약물 모두 부작용 프로필도 양호했습니다.

 

이제 에볼라 치료 지침에는 이 두 항체치료제가 포함되었고, 실제 유행 현장에서 적극 활용되고 있습니다. 2021년 이후 콩고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한 에볼라 환자들은 이 치료제를 신속히 투여받아 예전보다 훨씬 개선된 생존율을 보였습니다. 에볼라와 사투를 벌여온 아프리카의 의사 무옘베 박사는 자신이 개발에 기여한 Ebanga가 고국 콩고의 환자들을 살리는 것을 보고 “에볼라를 드디어 콩고인의 손으로 이겨냈다”며 감격했습니다. 그는 2020년,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직 수단형, 번디부기오형 등 다른 종류 에볼라 바이러스에 효과적인 승인 치료제는 없는 만큼, 해당 분야 연구도 진행 중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더 이상 에볼라에 걸려도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릴 필요는 없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9. 현재의 대응 체계와 앞으로의 과제

에볼라 바이러스와의 50년 가까운 싸움은 인류에게 값진 성과와 교훈을 안겨주었습니다. 과거에는 그저 두렵기만 했던 이 질병에 대해, 이제 우리는 예방 백신과 치료제라는 무기를 손에 넣었습니다. 현재 아프리카에서 산발적으로 에볼라 환자가 발생하면, 각국 보건당국과 WHO는 신속대응팀을 투입하여 환자 격리접촉자 추적, 예방접종 시행 등 종합 대응에 나섭니다. 이미 콩고민주공화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들은 에볼라 백신 비축분을 확보하고 있어서, 발병 즉시 고위험군에게 접종을 시작합니다. 치료제 역시 현장에 비축되어, 환자들이 확진되는 대로 Inmazeb나 Ebanga를 투여받고 있습니다. 덕분에 최근 몇 년간 발생한 소규모 에볼라 유행들은 예전처럼 수백 명씩 목숨을 잃는 사태 없이 비교적 빨리 차단되었습니다. 예컨대 20182020년 콩고 동부에서 3,300여 명이 감염된 유행 이후, 2021년과 2022년에 콩고와 우간다 등지에서 일어난 유행들은 수십백여 명 규모에서 조기 종식되었습니다. 이는 현지의 대응 역량 강화와 더불어, 국제사회의 지원 및 새로 확보된 백신·치료제 덕분이라 평가됩니다.

 

하지만 에볼라와의 전쟁이 끝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앞으로도 남은 과제들이 적지 않습니다. 첫째, 현재까지 개발된 백신과 치료제는 주로 자이르형 에볼라 바이러스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2022년 우간다에서 유행한 수단형 에볼라는 기존 백신으로 예방할 수 없어, 그 해에야 수단형 백신 후보에 대한 임상시험이 시작될 정도로 대응이 뒤쳐졌습니다. 다행히 수단형 후보 백신들이 개발 중이지만, 다른 아종인 번디부기오형 등에 대한 대비도 시급합니다. 범(汎)-에볼라 백신, 혹은 모든 필로바이러스를 포괄하는 광범위 백신의 연구가 미래에 필요할 수 있습니다.

 

둘째, 자연 생태계에서의 에볼라 바이러스 관리라는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에볼라는 야생동물—특히 과일박쥐—속에서 숨어돌며, 인간 활동이 숲을 침범할 때 불쑥 나타난다고 여겨집니다. 인간이 바이러스를 자연에서 완전히 없앨 수는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산발적 발병은 피하기 어렵습니다. 최근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로 인간과 야생동물의 접점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질병 출현 위험도 커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초기 감시와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지역사회 차원에서 커뮤니티 감시망을 구축해 환자 발생 징후를 조기에 포착하고, 보고 체계를 강화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현지 보건 인력의 지속적인 역량 강화훈련이 필요합니다.

 

셋째, 지속적인 자원 투입과 국제 공조가 요구됩니다. 에볼라 유행이 잠잠할 때도 대비에 소홀해지지 않도록, WHO의 비상기금 및 각국의 지원을 꾸준히 유지해야 합니다. 서아프리카 대유행 때 드러났듯이, 대응 자금이 확보되기까지 지체되면 그 사이에 병은 걷잡을 수 없이 퍼집니다. 신속한 대응을 뒷받침할 재정적 준비가 필수적입니다.

 

마지막으로, 에볼라 대응에서 얻은 경험을 다른 신종 전염병 대비에 응용하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에볼라와의 싸움은 2020년 전 세계에 닥친 코로나19 팬데믹 대응에도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에볼라 백신 개발 경험은 mRNA 등 새로운 백신 기술 개발을 가속했고, 접촉자 추적 기법과 국제 공조 모델은 코로나19 등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인류는 또 다른 전염병 도전에 직면할 것입니다. 에볼라 대응 역사에서 얻은 교훈과 시스템은 그러한 도전에 맞서는 귀중한 자산이 될 것입니다.

 

에볼라 바이러스는 한때 “현대 문명을 위협하는 열대의 역병”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반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수많은 의료 영웅들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구에 매진한 과학자들,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협력해 준 지역 주민들 덕분에 우리는 에볼라를 상당 부분 극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에볼라 이야기는 슬픔과 공포로 시작했지만, 결국 희망과 연대의 드라마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인류는 이 작은 바이러스를 완전히 정복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지만, “함께 힘을 모은다면 어떤 전염병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에볼라의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 사람들이라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들도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