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 중반 유럽 의학계에서 현미경 기술의 발전과 함께 발견된 백혈병은 현대 혈액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1845년 존 휴즈 베넷과 루돌프 피르호의 독립적 발견을 통해 시작된 백혈병 연구는 세포병리학 확립과 현대 의학 용어 체계 구축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피르호의 "leukämie" 명명과 세포병리학적 접근은 질병 이해의 패러다임을 장기 중심에서 세포 중심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 발견은 단순한 새로운 질병의 명명을 넘어 현대 의학의 과학적 기반을 마련한 의학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백혈병 발견의 시대적 배경과 최초 사례들
19세기 중반 유럽 의학계의 혁신
1840년대 유럽 의학계는 현미경 기술의 혁명적 발전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파리 의학교가 세계 의학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해부학적 병리학을 선도했고, 베를린의 샤리테 병원과 에든버러 의학교가 현미경 병리학 연구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현미경 기술의 발전은 백혈병 발견의 핵심 동력이었습니다. 1830년 조제프 잭슨 리스터가 색수차와 구면수차를 동시에 교정한 현미경을 개발하면서 의학 연구에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의 알프레드 도네가 의학 현미경학을 확립하고, 독일의 루돌프 피르호가 "현미경적으로 생각하라"는 교육 방침을 세우면서 현미경은 의학 진단의 필수 도구가 되었습니다.
초기 관찰에서 체계적 발견까지
백혈병의 최초 의학적 기록은 1811년 피터 컬렌(Peter Cullen)의 관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35세 남성 환자의 혈청이 "우유와 같은 색깔과 농도"를 보인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1825년 알프레드 벨포는 부검에서 10파운드로 비대해진 비장과 "고름과 같은 상태"의 혈액을 관찰했습니다.

알프레드 도네: 현미경 의학의 선구자
도네(1801-1878)는 "의학 현미경학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1837년 파리 의과대학에 20대의 현미경을 자비로 설치하여 유럽 최초의 의학 현미경 실습 과정을 개설했습니다. 1842년 혈소판을 발견하고, 1844년 백혈구 성숙 정지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특히 그는 1839년 루이 다게르(Louis Daguerre)가 개발한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 사진술을 현미경에 접목시켜, 현미경 사진을 의학 교육에 도입한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총 80장의 다게레오타입 이미지를 통해 정상 혈액과 백혈병 환자의 혈액 사이의 뚜렷한 차이를 시각적으로 제시하였습니다.
1844년 알프레드 도네의 현미경 관찰이 백혈병 발견의 직접적 전조가 되었습니다.
1844년, 도네(Donné)는 자신의 저서 『현미경 강의(Cours de Microscopie)』에서 라이에(M. Rayer)가 치료했던 한 사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창 나이의 남성 환자로, 동맥염(arteritis)을 앓고 있었으며 특히 하지에서 그 증상이 두드러졌습니다. 그는 점상출혈(ecchymosis)과 괴저성 수포(gangrenous phlyctenes) 등을 포함한 다양한 증상을 보였습니다. 이 환자의 혈액에는 백색 구형 입자(white globules), 즉 백혈구가 매우 높은 농도로 존재했기 때문에, 당시 도네는 혈액이 고름(pus)과 섞여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글을 집필하던 시점에는, 도네는 더 이상 그 백색 입자들이 고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적혈구로 전환되지 못한 백혈구가 과다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1845년: 백혈병 발견의 결정적 해
존 휴즈 베넷: 임상 현미경학의 체계화
베넷(1812-1875)은 에든버러 의과대학 교수로서 백혈병을 전신 질환으로 최초 인식했습니다. 1852년 35건의 백혈병 사례를 수집한 최초의 체계적 데이터를 발표했고, 환자 혈액의 현미경 관찰 결과를 직접 그린 최초의 백혈병 세포 삽화를 제작했습니다.
도네의 파리 현미경 강의를 수강한 후 현미경을 임상 진단 도구로 강력히 지지했으며, 이는 현대 진단 의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1845년 10월 존 휴즈 베넷이 28세 남성 환자의 사례를 "Edinburgh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 발표하면서 백혈병이 공식적으로 의학계에 소개되었습니다. 그는 복부 왼쪽에 종양이 있었고, 20개월 동안 지속된 “활동 시 극심한 무기력감(great listlessness with exertion)”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는 1844년 6월에 처음으로 종양을 발견하였습니다. 다양한 치료가 시행되었으나, 환자는 3월 15일 아침에 사망하였습니다.

부검 결과, 그의 혈액은 응고되어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탁하고 과립성인 벽돌색 붉은 부분, 다른 하나는 탁하고 불투명하며 밝은 노란색으로, 진한 크림색 고름(thick creamy pus)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간과 비장은 심하게 비대되어 있었고, 림프절과 심장 또한 비대되어 있었습니다. 2012년 논문에서 저자인 캄펜(Kampen)은 이 환자가 만성 골수성 백혈병(CML, Chronic Myeloid Leukemia)을 앓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좀 더 자세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진 피르호의 발견과 더불어 왜 이 사람의 발견이 먼저임에도 사람들은 피로호의 명명법을 따랐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845년 3월 19일, 스코틀랜드 의사 존 베넷은 특이한 사례를 기록했다. 비장(지라)이 이상하게 부풀어오른 28세의 슬레이트공 환자였다. "안색이 검다. 평소에 건강하고 절제하는 편이라고 한다. 그런데 20개월 전부터 지금까지 몸이 너무 나른하여 일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지난 6월에 배 왼쪽에서 종양이 하나 생긴 것을 알아차렸는데 , 4개월 동안 점점 커지다가 지금은 자라는 것이 멈추었다고 한다. "
슬레이트공의 종양은 최종 정쳬 단계에 이르렀을지 모르지만, 병세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다음 몇 주일에 걸쳐서 베넷의 환자에게는 이 증상, 저 증상이 돌아가면서 나타났다. 열, 일시적인 출혈, 갑작스러운 복부 통증이었다. 증상은 처음에 드문드문 나타났다가 점점 더 빨라지고 더 격렬해졌다. 곧 겨드랑이 , 사타구니 , 목에도 부풀어오른 종양이 생기면서 슬레이트공은 죽음의 문턱에 들어
섰다. 으레 하듯이 거머리로 피를 빨게 하고 하제를 써서 치료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몇 주일 뒤, 부검을 하던 베넷은 그런 증상들의 원인을 찾아냈다고 확신했다. 환자의 피는 백혈구로 가득했다.(백혈구는 고름의 주성분으로서, 감염되었을 때 으레 백혈구가 증가하므로 , 베넷은 슬레이트공이 무엇인가에 감염되어 죽었다고 추론했다.) 그는 자신 있게 썼다. "나는 이 사례가 특히 가치가 있다고 본다. 혈관계 안에서 보편적으로 형성되는 진정한 고름이 있음을 보여주 는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 *
암: 만병의 황제의 역사 p.23
즉 그는 백혈병은 피가 곪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피르호의 사례
베넷이 슬레이트공의 병을 기록한 지 4개월 남짓 지난 뒤, 24세의 독일 연구자 루돌프 피르호는 베넷의 사례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사례를 독자적으로 발표했다.피르호의 환자는 50대 중반의 요리사였다, 그녀의 피에서는 백혈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비장에 치밀하고 걸쭉한웅덩이까지 형성되었다. 부검 때, 병리학자들은 굳이 현미경을 쓰지 않고서도 적혈구 위쪽에 뜬 짙은 우윳빛 백혈구 층을 구분할 수 있었다.
피르호는 베넷의 사례를 알았지만, 그의 이론을 믿지는 못했다. 피르호는 피가 충동적으로 다른 무엇인가로 변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특이한 증상들이 그를 성가시게 했다. 비장은 왜 그렇게 거대해진 것일까? 몸에 고름의 원천이나 상처가 전혀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피르호는 피 자체가 비정상인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증상들을 종합할 설명을 찾을 수 없는 상태에서, 이 상태에 알맞은 병명을 찾다가 피르호는 바이세스 블루트(weisses Blut), 즉 백혈(白血)이라는 명칭을 택했다.현미경으로 본 수백만 개의 세포를 그대로 기술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1847년에 그는 "흰 색" 을 뜻하는 그리스어 레우코스(leukos)에서 따와서, 좀더 학술적으로 들리는 "백혈병(leukemia)"으로 병명을 바꾸었다.
루돌프 피르호의 탁월한 기여
세포병리학의 아버지
피르호(1821-1902)는 단순한 백혈병 발견자가 아니라 현대 병리학의 기초를 확립한 혁신가였습니다. 프로이센 군사 아카데미 장학금으로 베를린 의과대학에 입학한 그는 요하네스 뮐러 밑에서 현미경 기술을 익혔고, 1843년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Omnis cellula e cellula"(모든 세포는 세포에서 나온다)라는 원칙을 확립한 것입니다. 이는 질병을 세포 수준에서 이해하는 세포병리학의 기초가 되었고, 장기 중심에서 세포 중심으로의 의학적 패러다임 전환을 이끌었습니다.
백혈병 연구의 혁신적 접근
피르호의 백혈병 연구는 단순한 관찰을 넘어 과학적 방법론의 혁신을 보여줬습니다. 1845년 최초 관찰에서 그는 고름이 아닌 혈액 내 백혈구의 비정상적 증가임을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기존의 감염성 과정이라는 해석과 달리, 백혈구를 생성하는 조직 자체의 문제임을 규명한 것입니다.
1847년 "leukämie" 명명은 그의 탁월한 언어학적 감각을 보여줍니다. 그리스어 "leukos"(흰색)와 "haima"(혈액)를 결합한 이 용어는 현미경 하에서 관찰되는 비정상적으로 많은 백혈구로 인한 혈액의 "하얀" 외관을 정확히 표현했습니다.
의학 교육과 연구 체계 확립
피르호는 1847년 베노 라인하르트와 함께 "Virchows Archiv"를 창간하여 과학적 의학 연구의 표준을 제시했습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이론을 배제하고 과학적 근거 없는 추측을 금지하며, 엄격한 실험적 검증을 요구하는 편집 방침을 세웠습니다. 이 저널은 현재까지도 권위 있는 병리학 저널로 발행되고 있습니다.
백혈병 명명의 언어학적 여정
그리스어 어원의 정확성
"Leukemia"라는 용어는 언어학적으로 매우 정확한 명명입니다. 그리스어 λευκός(leukos, "흰색")와 αἷμα(haima, "혈액")의 결합으로 "흰 피"를 의미하며, 현미경 관찰 결과를 직관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피르호가 1847년 독일어로 "leukämie"를 처음 사용한 후, 1851년 영어권에서 "leukemia"로 확립되었습니다. 이 용어는 프랑스어 "leucémie", 이탈리아어 "leucemia", 스페인어 "leucemia" 등으로 확산되어 국제적 표준 의학 용어가 되었습니다.
동아시아 언어권의 번역
동아시아 언어권에서는 의역 방식을 택했습니다. 한국어 "백혈병"(白血病), 일본어 "白血病"(はくけつびょう), 중국어 "白血病"(bái xuè bìng) 모두 "흰 혈액의 질병"이라는 의미를 정확히 번역했습니다.
베넷과의 우선권 해결
존 휴즈 베넷이 1845년 10월 "leucocythemia"를 제안했고, 피르호가 6주 후 "weisses blut"로 기술한 후 1847년 "leukämie"로 명명했습니다. 1858년 피르호가 베넷의 우선권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면서 학문적 갈등이 우아하게 해결되었습니다.
현대 의학에 미친 지속적 영향
진단학의 혁신
백혈병 발견은 현미경 진단의 확립으로 이어졌습니다. 1876년 모슬러의 골수 천자 기법 개발, 현대 혈액학 검사의 기초 확립 등이 모두 백혈병 연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치료법 개발의 기반
19세기 말 X-ray를 이용한 초기 치료 시도에서 시작하여, 1940년대 메토트렉세이트 등 항암제 개발, 1990년대 이마티닙(Gleevec) 등 분자표적치료제 개발에 이르기까지 현대 항암 치료의 모든 발전이 백혈병 연구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의학 교육의 현대화
피르호의 "현미경적으로 생각하라"는 교육 철학은 현대 의학 교육의 기본 원칙이 되었습니다. 세포병리학은 현재까지도 의과대학 교육의 핵심 과목이며, 그의 "Omnis cellula e cellula" 원칙은 현대 생물학의 기본 법칙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결론
백혈병의 발견과 명명은 19세기 중반 유럽 의학계의 현미경 기술 발전, 국제적 학술 교류, 그리고 과학적 방법론의 확립이 결합된 의학사적 성취였습니다. 알프레드 도네의 선구적 관찰, 존 휴즈 베넷의 체계적 기술, 루돌프 피르호의 이론적 정립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현대 혈액학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특히 피르호의 세포병리학적 접근과 "leukämie" 명명은 질병 이해의 근본적 패러다임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현재까지도 의학의 기본 원리로 적용되고 있으며, 백혈병 연구에서 시작된 현미경 진단법, 골수 연구, 혈액 염색법 등은 현대 의학의 필수 도구가 되었습니다.
백혈병 발견의 역사는 기술적 진보와 국제적 협력, 학문적 경쟁이 결합되어 의학 발전을 이루어낸 대표적 사례입니다. 단순한 새로운 질병의 명명을 넘어 현대 의학의 과학적 토대를 확립한 이 발견은 의학사의 결정적 전환점이었으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영화속의 백혈병
과거 영화를 보면 백혈병 환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백혈병이 가장 진단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다른 암과는 달리 혈액을 채취해서 현미경으로 보기면 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백혈병이 암을 대표하는 질병이었습니다.
참고자료
더 자세한 자료는 아래 사이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clldigitalarchive.org/history/
History
Introduction The purpose of this timeline is to define the core historical findings that are common to all present-day leukemias. Our common understanding of leukemia is based upon the differentiat…
clldigitalarchiv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