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터 사건(Cutter Incident)에 대한 글입니다. 백신의 역사에서 중요한 교훈을 남긴 이 사건은, 단순한 실수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백신이 불러온 비극: 커터 사건의 전말
1955년 4월 12일, 미국 전역은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마비시키고 죽음에 이르게 했던 공포의 질병, 소아마비(polio)에 맞서는 백신이 마침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백신은 조너스 소크(Jonas Salk) 박사에 의해 개발된 것으로, 비활성화된 폴리오 바이러스를 이용해 면역을 유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수많은 임상시험을 거쳐 안전성과 효능이 입증된 이 백신은 전 세계적인 희망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단 몇 주 뒤, 소아마비 백신을 맞은 어린이들 중 일부가 오히려 소아마비에 걸리기 시작했고, 심지어 사망하는 사례까지 발생했습니다. 이 비극의 중심에는 커터 연구소(Cutter Laboratories)라는 제약회사가 있었습니다.
백신은 안전해야 한다 – 커터 사건과 미국 법원의 판결
1955년,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소아마비(polio)에 대한 백신이 드디어 등장했습니다. 조너스 소크(Jonas Salk) 박사가 개발한 불활성화 소아마비 백신은 수많은 임상시험을 거쳐 승인되었고, 미국 전역에서 대규모 접종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백신의 성공을 향한 이 역사적인 순간은 한 회사의 실수로 인해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커터사의 실패, 그리고 한 가족의 소송
백신을 제조하던 제약회사 중 하나인 커터 연구소(Cutter Laboratories)는 정부의 승인을 받아 소크 백신을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커터사가 제조한 일부 백신 로트에서는 죽었어야 할 폴리오 바이러스가 살아 있는 채로 남아 있었고, 이 백신을 접종받은 아이들 중 상당수가 실제로 소아마비에 걸리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이른바 ‘커터 사건(Cutter Incident)’입니다.
수천 명의 경증 감염자, 수백 명의 마비, 그리고 여러 명의 사망자까지 발생하면서 미국 사회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피해자 가족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Gottsdanker 가족은 아이가 백신 접종 후 소아마비에 걸린 것을 근거로, 커터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미국 제품 책임법의 역사를 바꾼 판결로 이어지게 됩니다.
고츠댕커 가족의 슬픈 이야기
당시 소아마비 백신의 희생자의 가족에는 로버트 고츠댕커(Robert Gottsdanker)와 그의 아내 조세핀(Josephine)도 있었습니다. 이 부부는 다른 사람들보다 소아마비 바이러스의 참상을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의 여러 자녀가 이 병에 감염되어 그 고통을 직접 목격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츠댕커 부부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산타바바라 캠퍼스에서 일하던 학자들이었습니다. 남편은 심리학자였고, 아내는 상담사였으며, 과학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설크(Salk) 백신 임상시험 결과가 발표되기도 전에, 이들은 두 자녀가 가능한 한 빨리 백신을 맞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4월 12일 토머스 프랜시스(Thomas Francis)의 기자회견이 있은 지 며칠 후, 가족 주치의는 고츠댕커 부부의 자택을 방문해 다섯 살 앤(Anne)과 일곱 살 제리(Jerry)에게 직접 주사를 놓았습니다.
처음에는 고츠댕커 부부도 안도했습니다. 자신들의 노력 덕분에 자녀들이 백신을 맞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4월 18일 주간에 예정된 휴가를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국적인 백신 부족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소문 속에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곧 그 열정이 의문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가족이 샌디에이고에서 동쪽으로 약 120마일 떨어진 작은 국경 마을 칼렉시코(Calexico)에 도착했을 때, 두 아이 모두 병에 걸렸습니다. 제리는 곧 회복되었고, 나중에는 아팠던 기억조차 희미했습니다. 그러나 여동생 앤은 운이 좋지 않았습니다. 가족이 산타바바라로 돌아왔을 때, 앤은 양쪽 다리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백신을 맞은 지 불과 일주일 만에, 고츠댕커 부부의 어린 딸은 전신 마비성 소아마비에 걸린 것입니다.
그달 말, 고츠댕커 부부는 딸이 커터 연구소(Cutter Labs)에서 제조된 오염된 백신을 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사례는 워싱턴에서 처음 경고등이 켜진 계기 중 하나였습니다.) 이 부부는 백신을 구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움직였던 만큼, 감염된 뒤 느낀 배신감도 컸습니다. 이들은 손해배상 청구를 위해 커터 연구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40여 가족 중 가장 먼저 나선 이들 중 하나였습니다. 1957년 11월 22일, 설크 백신이 처음 대중에 제공된 지 19개월 만에 Gottsdanker 대 Cutter 연구소 사건의 첫 변론이 캘리포니아주 알라메다 카운티 고등법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재판은 처음부터 특이한 양상을 띠었습니다. 양측은 서로의 주장 가운데 핵심적인 요소를 기꺼이 인정했습니다. 커터 연구소의 의학 책임자인 월터 워드(Walter Ward)는 앤의 마비가 살아있는 바이러스가 주입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는 데 동의했고, 고츠댕커 부부의 변호사 멜빈 벨리(Melvin Belli)는 이 오염이 정부의 안전 기준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지, 커터 측의 과실 때문은 아니라고 인정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법률 용어로 말하는 ‘묵시적 보증(implied warranty)’이 위반되었는지를 중심으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법정의 판단 – 과실은 없지만, 책임은 있다
법정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커터사가 잘못을 저질렀는가”였습니다. 전문가들의 증언과 정부 문서에 따르면, 커터사는 당시 존재하던 정부 기준을 모두 따랐으며, 과학적으로 가능한 검사도 수행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따라서 법원은 커터사에 의도적인 잘못이나 부주의는 없었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법원은 중요한 원칙 하나를 적용했습니다. “결과책임(strict liability)”, 즉 제조업체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품이 결함이 있어 소비자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백신처럼 위험성과 복잡성을 동시에 가진 제품일수록, 제조사는 그 위험에 대해 더욱 엄격하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단이 내려진 것입니다.
결국 커터사는 과실이 없었지만 법적 책임을 인정받았고, Gottsdanker 가족은 배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판결은 1960년 캘리포니아 항소법원에서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결과책임 원칙의 탄생, 그리고 백신 신뢰의 회복
이 소송은 단순한 개인 배상 사건을 넘어, 현대 제품책임법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Gottsdanker 사건 이후, 미국에서는 백신뿐 아니라 의약품과 소비재 전반에 걸쳐 “제조사의 결과책임”이 법적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판결이 주는 여파는 또 하나 있었습니다. 커터 사건으로 인해 백신 제조사들은 무분별한 소송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고, 소아마비 이후 개발되던 여러 백신에서 제약사들이 시장에서 철수하거나 개발을 포기하는 일이 잇따랐습니다.
이 같은 상황은 결국 미국 정부가 1986년, 국가 백신 피해 보상 제도(NVICP: National Vaccine Injury Compensation Program)를 도입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 제도는 백신 피해자에게는 보상 체계를 제공하고, 동시에 제조사에게는 과도한 법적 부담을 줄여주는 절충안이었습니다. 백신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지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던 셈입니다.
커터 사건이 우리에게 남긴 것
Gottsdanker v. Cutter 사건은 단순히 백신 제조사의 실패에 대한 소송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학과 법, 그리고 공공보건이 만나는 지점에서 “책임”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정의되고 적용되어야 하는가”를 묻는 판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믿고 맞는 백신은, 그 안에 담긴 과학뿐 아니라 수많은 실패와 교훈, 법적 진통, 그리고 제도적 안전망 위에서 탄생한 결과입니다. 백신의 안전은 단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감시하고 지켜야 할 공동의 책임이라는 것을 커터 사건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커터 사건에 대한 저의 의견
대부분의 글에는 이 커터사에서 뭘 잘못했는지 자세히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필터를 하는 여과지를 바꾸었습니다. 언듯 보면 단순한 것이지만, 커터사는 규정내에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이며, 저는 검증되지 않은 여과지를 사용해서 사고를 낸 것은 분명히 문제였기 때문에 커터사의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커터사들의 사람들이 나쁘진 않겠지만, 역사적으로 커터 사는 한 번 더 치명적인 사고를 칩니다. 이것은 잘못하면 우리나라에도 큰 피해를 입힐 뻔 했고, 피해자가 일본에서도 나온 것으로 압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으로 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커터사와 소송을 했던 고츠댕커 가족의 희생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아주 가끔 지역 신문에 과거의 이야기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Antelope Valley College 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것으로 되어 있고, 가족관계에 시누이(이런 것이 번역되는 지는 처음 알았습니다.)가 표시된 것으로 봐서는 결혼을 한 것 같고, 페이스북에 다른 사람의 사진이 올라오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지금 거의 혼자 사는 것 같습니다. 그의 페이스북에는 부모님 사진이 딱 한 장 있습니다.
저도 신약을 개발해서 허가를 받아본 사람으로서 이런 희생자를 보면서 남의 일 같지 않아 보입니다. 이런 사건을 거치면서 겸손해 지는 것이겠죠. 최근 사진이 올라오지 않았는데, 원래 사진을 자주 올리시지 않는 분이긴 하지만 좀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
참고
https://www.sfgate.com/health/article/When-polio-vaccine-backfired-Tainted-batches-2677525.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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